지난 1월11일부터 23일까지 열이틀 동안 제2회 BC카드배 세계오픈과 제11회 농심배 세계대회가 잇달아 열렸다. ‘세계’라는 말이 붙었지만 실제로는 한-중-일 세 나라 대회다. 세 나라 기사들은 매우 바쁜 일정을 보냈다. BC카드배는 프로-아마가 같이 참여하는 통합예선으로 본선 진출자 64명을 추려낸 후, 본선 첫 판을 진행해 두어 32강을 가렸다. 64강전까지는 한 날 동시에 두었는데, 32강전부터 달라졌다. 1월 28일에 한 판, 29일에 두 판, 이런 식이다. 1월 28일의 32강전 한 판은 안조영 9단 대 연구생 소년 한태희의 대결이었다. 한태희는 64강전에서 이창호 9단을 상대로, 그것도 백을 들고 96수만에 불계승을 거두어 주요 일간지의 바둑 소식란을 대문짝만하게 장식했던 루키. 64강 본선에 올라온 5명의 아마추어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여서 관심의 초점이 되었으나 일단은 ‘거기까지’, 안 9단에게 백을 들고 87수만에 돌을 거두면서 이기고 지는 것을 모두 ‘초단명국’으로 기록하고 내려갔다. 1월18일부터 부산 농심호텔에서 열린 농심배에서는 중국의 씨에허 7단과 일본의 하네 나오키 9단이 주인공 노릇을 했다. 씨에허는 지난해 11월 베이징에서 열린 1회전에서 연승을 달리던 김지석 7단을 3연승에서 멈추게 하더니 부산으로 넘어와서는 일본의 이야마 유타 9단, 한국의 김승재 3단, 일본의 야마다 기미오 9단, 한국의 윤준상 7단을 차례로 격파, 5연승 깃발을 올린 후 6연승 째에서 일본의 마지막 주자, 현 본인방 타이틀 보유자인 하네 나오키 9단에게 졌다. 절체절명의 장면에서 등장한 하네는 다음 판에서 한국의 박영훈 9단을 꺾고 2연승, 일본의 체면과 자존심을 겨우 지키는 것으로 2회전을 마무리했다. 한바탕의 바둑 잔치가 끝났다. 잔치는 화려했다. 이변과 기록이 풍성했다. 바둑팬들은 2주일 가까이 바둑TV와 인터넷 바둑 사이트를 떠날 수 없었다. 연구생 나현이 중국의 위빈 9단을 꺾고 BC카드 본선에 올라갈 때는 환호했고 한태희가 이창호를 쓰러뜨릴 때에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씨에허가 거침없이 달리는 모습을 보면서는 감탄하면서 푸념했고, 하네의 반격에는 아낌없이 박수를 쳤다. 정말이지 숨 돌릴 틈 없는 2주일이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좀 허전하다. 잔치가 끝나면 늘 그런 것이어서 그런 건지 모르지만 허전하다. 몇 가지 되돌아보게 되는 게 있다. (1) 씨에허는 열이틀 동안에, 서울에서 네 판을 두고, 짐을 싸들고 부산으로 내려가, 내려가는 그 날 하루 쉬고 다시 다섯 판, 모두 자그마치 아홉 판을 두었다. 보통 같으면 말이 잘 안 되는 건데, BC카드배는 제한시간이 각자 2시간의 ‘준속기’, 농심배는 제한시간 각자 1시간의 속기전이었기에 그나마 다행이었다. 준속기나 속기나 속기인 것은 마찬가지다. 제한시간이 각자 1시간 이내면 그건 ‘초속기’다. (2) BC카드배는 통합예선과 64강 본선 첫 판을 서울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 연회장에서 두었다. 널찍한 홀이다. 예선 참가자는 수백 명이었지만, 그건 차치하고 64강을 뽑는 예선 결승만 보더라도 128명이 동시에 대국을 했다. 계시기는, 16강 혹은 그 이상이면 눌러 주는 사람이 따로 있지만, 예선이나 64강전 같은 경우는 각자 눌러야 한다. 제한시간이 다 되면 초읽기가 시작된다. 요즘은 계시기가 초를 불러 준다. 그러니 대국장은, 아니 대국자는 정신이 없다. 돌 놓는 소리, 계시기를 탁! 소리 나게 누르는 소리. 초를 읽는 기계음…. 지금 초를 읽는 저 소리가 나의 초읽기인지 상대방의 초읽기인지, 옆의 다른 대국자의 초읽기인지 헷갈리기 쉽다. (3) 이창호, 이세돌, 구리, 콩지에, 이야마 유타, 야마다 기미오 등은 세계 톱클래스의 프로기사들이다. 세계 최고봉들이다. 이들이 연구생 소년들과 맞바둑으로 진검승부를 펼친다. 세계 정상이라고 해서 특별히 무슨 예우를 한다든가, 그런 건 없다. 넓은 마당에서 드잡이질을 하다가 이기면 되는 것이다. 이건 격투기다. 바둑도 체육이 되었으므로, 바둑이나 격투기나 체육의 한 종목이라는 점에서는 ‘호선’이다. 이게 바둑이 살 길이고, 바둑의 미래가 거기에 있다면, 그런 보장만 있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혹 이런 건 마음에는 좀 들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참아야 한다. 그런데, 한 가지 생각할 게 있는 것 같다. 격투기에서도 ‘체급’이란 게 있다. 헤비급과 플라이급이 호선으로 싸우지는 않는다. 막상 붙으면 플라이급이 이기는 경우도 혹간 있을지 모르는 일이지만, 그런 경기는 없다. 바둑도 체육이 되었으니, 바둑에도 체급을 도입하면 어떨까. 몸무게로 구분하기는 그렇고, 단(段)의 높고 낮음도 무의미해진 요즘이니, 그렇다면 나이로 가르는 것은 어떨까. 우스운 얘기다. 그러나 이번에 구경한 대국장의 모습도 좀 우습기는 마찬가지다. 제한시간 1시간이나 2시간인 바둑과 제한시간이 5시간 혹은 8시간의 이틀걸이 바둑과 비교하면 어떨까. 후자가 아무래도 공이 더 들어가는 것은 아닐까. 기보가 프로기사의 작품이라면 시간을 더 들이고 공을 더 들인 기보가 아무래도 낫지 않을까. 재미는, 시간의 길이와는, 항상 비례하는 건 아니다. 짧아서 재미있는 게 있고 길어서 재미있는 게 있다. 감동은? 조금 다르지 않을까. 감동은, 대개는 시간에 비례한다. 그리고 재미와 감동은 동전의 양면이다. 하네 나오키의 2연승이 가슴에 와 닿는다. 일본이 좋아서가 아니다. 일본 바둑이 살아야 한-중-일 바둑삼국지가 재미있어진다는 이유에서도 아니다. 하네는 8시간 바둑을 두어 본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이긴다는 것, 그런 사람도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 것이 반가워서다. 세상은 요즘 ‘느림’, ‘느림’ 한다. 너무 빠른 것에 질렸고, 이게 아니다 싶어서다. 그런데 느림의 원조 격인 바둑은 거꾸로 ‘빠른’ 쪽으로 간다. 솔직히 이게 마음에 들지 않고, 그래서 바둑의 미래에 불안을 느낀다. 바둑 자체야 지금까지 유구한 세월을 흘러왔듯 앞으로도 유구한 시간을 흘러갈 것이다. 불안한 것은 한국의 바둑, 우리 바둑의 미래다. 나현이 위빈을 이긴 것이나 한태희가 이창호를 이긴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그러나 대결의 조건, 대결의 장소가 받쳐주지 못한 까닭에 감동은 희석되고 증발되었다. BC카드배와 농심배를 연달아 연 것도 이상한 일이다. 투자 대비 효과가 반감되었다. 이건 뭐, 페넌트 레이스도 아니고, 올림픽과 월드컵을 동시에 열면 어쩌자는 것인가. /전 월간바둑 편집장, 현 일요신문 바둑 해설위원 농심배에서 일본의 하네 나오키 9단과 한국의 박영훈 9단이 대결을 펼치고 있다. 하네 나오키가 이겨 2연승으로 2회전을 마무리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