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김대호 객원기자] 한국야구의 유격수 계보가 또 한 다리를 건넜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부터 한국 대표팀의 유격수 자리를 지켜온 박진만(33.삼성)이 어깨 부상을 이유로 자연스럽게 박기혁(28.롯데)에게 바통을 넘겼다. 박진만의 나이로 볼 때 다시 주요 국제대회에서 태극마크를 달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박기혁으로선 천재일우의 기회를 잡은 셈. '내야수의 핵'인 유격수는 국가대표가 되는 순간 '계보'에 오를 만큼 그 존재가치가 대단하다. 한국야구의 유격수 계보는 1960년대 이후 50여 년 동안 거쳐 간 선수가 5명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근접하기 어려운 자리다. 박기혁이 이들 대선배들에 이어 6세대에 이름을 올릴 지 그것은 오로지 선수 자신의 몫이다. 해방 이후 한국에서 성인야구가 본격적으로 자리 잡은 이후 최초의 대형 유격수는 부산고-상업은행 출신의 하일(65)이다. 하일은 유격수의 중요성을 처음 알린 선수로 기록돼 있다. 빠른 발놀림과 강한 어깨는 다른 유격수와 차별화되는 단연 독보적인 장기였다. 하일은 실업 초년병인 1963년 아시아선수권대회부터 태극마크를 달기 시작해 1973년까지 10년 넘게 아성을 지켰다. 하일의 철옹성을 무너뜨린 '새로운 별'이 나타났으니 김재박(55)이었다. 김재박은 영남대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75년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그야말로 혜성과 같이 등장해 한국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대표팀 막내로서 주전 유격수 자리를 꿰찬 김재박은 호주와의 준결승에선 투수로 마운드에 올라 팀 승리를 지켜내는 대활약을 펼쳤다. 김재박은 실업팀 한국화장품에 입단한 1977년 한국야구 사상 전무후무한 7관왕의 기록을 세웠다. 김재박은 유격수는 '수비의 꽃'이라는 통념을 깨고 공-수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대형 선수가 되었다. 특히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글러브질과 폭넓은 수비범위는 유격수 수비의 교과서가 되었다. '김재박=한국 유격수' 등식은 1982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까지 이어졌다. '개구리 점프'로 유명한 김재박의 스퀴즈번트로 이 대회에서 우승을 이뤄낸 한국은 세계무대의 변방에서 주연으로 자리매김했다. 프로 출범 이후에도 김재박의 명성은 한 동안 계속됐다. 프로 초창기 대구상고-한양대 출신의 오대석(50)이 '제2의 김재박'이란 칭송을 들었지만 결국 그 아성은 넘지 못했다. 명실상부한 김재박의 후계자는 경북고-한양대 출신의 류중일(46)이었다. 류중일의 유격수 수비는 김재박보다 더 세련됐고 화려했다. 류중일의 장점은 부드러움과 어우러진 강한 어깨. 아마추어 시절 부동의 대표팀 유격수로 활약하던 류중일은 1987년 삼성에 입단한 뒤 쇠퇴기를 맞고 있던 김재박의 뒤를 이어 한국 최고의 유격수로 올라섰다. 류중일의 가치는 당시 '15승 투수'보다도 뛰어나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 권불십년이라고 했던가. 류중일의 높은 벽은 1993년 광주일고-건국대 출신의 이종범(39)이 프로에 데뷔하면서 무너져 내렸다. 이종범은 류중일보다 더 강한 어깨와 한 박자 빠른 발을 살려 프로야구 판을 휩쓸었다. 이종범은 수비 뿐 아니라 타격에서도 전광석화 같은 스윙 스피드로 해태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끌었다. 다만 다소 경직된 몸놀림이 장수의 걸림돌이 됐다. 이종범은 스스로의 한계를 느끼고 외야수로 전향해 지금까지 제2의 야구인생을 열어가고 있다. 이종범의 뒤를 이은 선수가 이번에 태극마크를 반납한 박진만이다. 1996년 인천고를 졸업하고 현대 창단멤버로 입단한 박진만은 대선배 김재박 감독의 지도를 받으며 단숨에 한국을 대표하는 유격수로 성장했다. 박진만의 완급을 조절하는 유격수 수비는 선배들의 그것을 한 차원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박진만의 '허허실실' 유격수 수비는 뜻하지 않은 어깨부상으로 대표팀에서 종말을 고했다. 그리고 그 무거운 책임은 박기혁에게로 넘겨졌다. 박기혁이 기라성 같은 선배들의 명성을 이어받을 지는 미지수다. '최고 유격수'의 계보는 쉽게 전수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