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스포츠 야구부장 시절인 1980년대 말 최동원의 아버지 최윤식씨와 자주 만났습니다.
최동원이 경남고 3학년 때인 76년 초 취재를 하면서 처음 대면한 최씨는 아들이 롯데에 입단한 후 연봉 문제로 기자들과 이야기를 많이 했고 1988년 11월 최동원이 선수회를 결성하려는데 앞장 선 이유로 롯데 구단이 삼성의 김시진과 트레이드를 감행한데 대해 불만이 많았습니다.
최씨는 저보다 10여년 선배인데 제가 84년 LA 올림픽에 취재를 갔다가 교통사고로 척수손상을 입고 휠체어를 타는 신세가 되고 자신은 6.25 동란 때 학보병으로 나가 소대장 근무를 하다가 포탄 파편에 오른다리를 크게 다쳐 커다란 철심을 박아 놓아 약간 절룩거리면서 다니니까 동병상련이라고 더 가깝게 지냈습니다.

다리 부상으로 부산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적적하던 차에 현해탄 건너 일본 프로야구 라디오 중계방송을 들으면서 야구 지식을 쌓았다는 최씨는 퇴원 후 부산에서 교직 생활을 하면서도 자주 일본에 가 당시로는 국내에 없었던 일본 투수들의 투구폼 필름 등을 구입해 자신이 직접 아들의 피칭을 가르치며 어느 지도자보다 앞선 노하우를 가지고 있다고 자랑했습니다.
최씨는 최동원이 연봉 문제로 구단과 마찰을 빚을 때 적극 간여해 ‘극성 아버지’라고 야구계에서 소문이 났습니다.
저와 친해지자 최씨는 나중에는 아들이 장가를 갈 때가 됐으니 도와달라는 말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상대가 각계 유명인들도 있어 흥미로 왔고 난감했던 기억도 납니다.
그리고 몇 달 후인 89년 5월 24일 퇴근 후 밤중에 집으로 최씨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내일 동원이가 결혼식을 올리는데 가족끼리만 하려다가 천 부장한테는 안 알릴 수 없어 알린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전에는 결혼식을 하게 되면 사직구장에서 3만 팬들 앞에서 식을 올리느니, 아니면 한강둔치에서 식을 거행한다는 등 거창한 혼례도 생각했던 분이 갑자기 ‘비밀결혼’이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늦은 밤 기사 마감 시간에 접한 소식이었으나 일간스포츠 다음 날 자 가판 1면 사이드에 크게 최동원의 결혼 소식이 단독보도로 실렸습니다.
신부는 서울대 음대에서 기악을 전공한 참한 규수 신현주 씨였고 장소는 서울 강남 뉴월드호텔 지하식장이었습니다.
식장은 결혼식 분위기가 전혀 풍기지 않았고 '김정희 여사 가족모임'이라는 안내표지만 나붙어 있었고 몇 몇 사진기자들이 취재하려 하자 호텔측에서는 몸싸움까지 벌이며 극구 취재를 막았습니다.
당시 가정의례준칙에 따라 호텔에서는 결혼식을 못한다는 규제 때문에 호텔측이 일방적으로 말린 것으로 나중에 밝혀져 최윤식 씨가 호텔측를 나무랐습니다.
야구인은 롯데 선수 가운데 한문연 등 2명뿐이었고 이용일 KBO사무총장조차 최윤식 씨로부터 "점심이나 같이 하자"는 전갈을 받고 호텔을 찾아가서야 그게 최동원의 결혼식장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한국야구계의 가장 큰 별이었던 그가 많은 팬들의 축복을 받지 못한 것은 그 자신뿐 아니라 여러 팬들에게도 섭섭한 일이어서 특종을 하고도 씁쓸했던 저는 최씨에게 항의도 했으나 그냥 조용히 치르고 싶어서라고 하더군요.

부산 토성중 시절부터 발군의 투수로 각광을 받은 최동원은 경남고 3학년 때 제31회 청룡기 고교야구대회 승자결승에서 군산상고를 상대로 탈삼진 20개로 전국대회 최다탈삼진 신기록을 세우며 9-1로 대승하고 최종결승전에서도 군상에 5-0 완봉승을 거두어 최고투수로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연세대 1학년 시절 대표팀에 뽑혀 니카라과 슈퍼월드컵 대회에 출전해 한국야구가 세계 정상에 처음으로 오르는데 크게 공헌했는데 저도 취재를 가 지진과 내전으로 어수선했던 나라에서 함께 고생했습니다.
연세대를 거쳐 1981년 실업야구 롯데 자이언트에 입단한 최동원은 그해 17승1패라는 빼어난 성적을 올리고 실업야구 최우수선수, •최우수 신인, •최다승리투수 등 3관왕에 올랐습니다.
프로 롯데에 입단하고 2년째인 84년에는 정규시즌 MVP에 선정되고 한국시리즈에서는 전무후무한 4승을 혼자 기록하는 괴력을 선보였습니다.
최강 삼성을 상대로 선발로 4경기에 나가 3승을 거두고 구원승이 하나 더 있습니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도 월드시리즈에서 혼자 4승을 올린 투수는 아직까지 없습니다.
랜디 존슨(애리조나. 2001년) 등 7명이 3승을 올린 게 최고 기록입니다.
최동원의 드롭 커브, 일명 폭포수 커브가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그리고 가끔 구사하는 아주 느린 커브 ‘아리랑 커브’가 웃음을 자아내게 했죠.
최동원은 경남고를 졸업하고 얼마있다가 일본의 롯데 구단 가네다(金田正一) 감독이 양자로 입양하고 싶다는 요청이 있어 일본에 갈 기회가 있었으나 집안에서 가네다 감독이 재일동포 출신이라고 해도 귀화한 일본인 양자는 안된다고 막아 일본프로에서 뛸 기회가 무산된 적이 있습니다.
또 77년 니카라과 슈퍼월드컵 대회 우승 당시에 메이저리그팀 볼티모어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으나 병역 문제로 구체적인 논의없이 끝났습니다.
81년 캐나다 에드먼턴 대륙간컵 대회서 최우수선수상을 받자 토론토 블루제이스에서 정식 입단 제의가 와 4년간 연봉 61만 달러에 보너스 1만 달러로 계약까지 체결했다가 이 계약이 지나치게 낮게 책정된 내용임을 파악한 아버지 최윤식씨는 병역 문제도 있어 계약을 파기해 미국행이 좌절된 적이 있습니다.
무쇠팔’ 괴력에 담대하고 도전적인 성격을 가진 최동원은 자신의 투구에 대해 “선수 시절에 패스트볼, 드롭 커브와 함께 슈트볼-요즘의 투심-을 제법 잘 구사했습니다. 타자 몸쪽으로 휘어지거나 몸쪽으로 떠오르는 공이었죠. 20여년전에도 이런 공을 던질 줄 아는 투수들이 몇 명 있었으나 구사하기가 힘들었는데 제가 이 공을 비교적 제대로 던져 요긴하게 통했습니다”고 회상했습니다.
프로 통산 8년 동안 103승74패26세이브, 평균자책점 2.46의 기록을 남겼습니다.
통산 248경기 중 3분의 1에 가까운 80경기를 완투(완봉은 15차례)로 장식해 강한 어깨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했죠.
논리 정연한 말투로 프로야구 선수들의 단합을 이끌었던 그는 선수 은퇴 후 정치판과 방송계에 발을 들여놓고 1991년 지방의회 선거 때 당시 여당이던 민자당의 텃밭 부산 서구에서 '민주당' 간판을 달고 출마했지만 낙선했습니다.
방송사 해설위원, 라디오 쇼 진행자, 시트콤 배우 등으로 색다른 분야에서 활동도 했습니다.
그때마다 저를 찾아와 자문을 구하길래 저는 양쪽 길 모두 환영하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선수회 사건으로 미운 털이 박혀 프로야구계에 복귀하기가 어려웠던 그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은퇴 10년 만인 2001년 한화 이글스의 이광환 감독의 배려로 지도자(코치)로 야구판에 복귀해 2006년부터 3년간 한화 2군 감독을 지냈고, 2009년에는 한국야구위원회(KBO) 경기감독관으로 그라운드를 지켰습니다.
최동원은 10년 전 "아버지께서 늘 주위의 이야기에 흔들리지 말라며 힘을 실어줬다. 또 즐겁게 열심히 사는 게 건강하게 사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주신 내 인생의 멘토"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최윤식 씨가 2003년 지병으로 타계했고 최동원 본인도 2011년 9월 14일 새벽에 4년 전 발견된 대장암이 번져 53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일주일 전에는 그보다 두살 위인 최고 타자 장효조가 갑자기 떠나 저로서는 가까웠던 야구계 별들이 한꺼번에 너무 일찍 스러져 더 한층 허탈합니다.
불세출의 투수인 최동원은 큰 별 중의 큰 별이었습니다.
스타 중의 스타가 조금 빠른 시간에 우리들 곁에서 사라진 것입니다.
OSEN 편집인 chunip@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