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0일. 심영성(25, 강원)이 부활의 노래를 시작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꼬박 3년 6개월을 보낸 심영성은 그라운드 위에서 부활을 선언했다.
심영성의 축구 인생에는 잊을 수 없는 공백이 있다. 2010년을 가로지르는 공백은 잊으려 해도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 아픈 기억으로 가득하다. 한 순간의 졸음운전으로 치른 대가는 너무나도 혹독했다. 지난 2010년 1월 10일, 고통의 순간은 지금도 너무나 선명했다. 하지만 심영성은 교통사고로 축구 인생에 종지부를 찍을 수도 있었던 아픈 과거를 딛고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섰다. 다섯 번의 수술과 헤아릴 수조차 없을 재활을 반복한 후 다시 그라운드에 선 심영성은 2012년 11월 4일 드디어 3년 6개월, 무려 1280일 만의 골을 터뜨리며 과거를 훌훌 털어버렸다.
전반 39분, 대전의 골망을 흔드는 강력한 오른발 슈팅을 성공시킨 심영성은 골맛이나 승리의 짜릿함과는 거리가 먼 얼굴을 보였다. 두 팔을 벌리고 그라운드를 달리면서 마음껏 세레머니를 펼쳤지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엄청 좋았죠. 하지만 생각하는 것만큼 좋았던 것 같진 않아요.” 심영성은 웃으며 덧붙였다. “K리그 데뷔골 같은 느낌이었어요. 경기 후에도 잘 몰랐는데, 끝나고 축하 문자랑 전화를 받고 나서야 아, 내가 골을 넣었구나 싶더라구요.”

▲ ‘천재 골잡이’ 과거를 벗고 날아오르다
“어떻게 보면 다친 게 잘된 걸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신인 같은 마음으로 밑바닥에서 다시 시작하는 입장이니까, 과거가 다 사라졌다고 해야 할까요.”
심영성의 목소리는 홀가분했다. 끔찍했던 사고의 기억은 아직까지 남아있지만 심영성은 이제 과거를 훌훌 털어낼 자신이 생겼다. 실로 오랜만에 맛본 골을 두고 ‘데뷔골 같았다‘고 표현했던 것처럼, 다시 시작하는 신인의 마음가짐으로 돌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교통사고 전까지 그는 한국 축구 스트라이커의 계보를 이을 인재로 손꼽혔다. 2006년 19세 이하(U-19) 아시아 청소년선수권대회에서 5골을 몰아넣으며 득점왕을 차지했다. K리그에서도 2007년 5골 1도움(25경기) 2008년 7골 3도움(23경기)을 기록하며 준수한 활약을 펼쳤다. 탁월한 재능과 축구 센스가 빛을 발하면서 ‘천재 골잡이’ 소리도 들었다.
기대가 컸던 만큼 교통사고 이후 심영성은 조바심에 시달렸다.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예전처럼 축구를 할 수 없다는 불안감이 심영성을 옥죄어왔다. 환하게 빛나던 과거는 심영성의 발목을 잡았고, 이제는 사라져버린 스포트라이트가 긴 그림자만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래서 심영성에게 대전전 골은 더욱 뜻깊었다. 심영성은 대전전 골 이후 많은 것이 바뀌었다고 했다. 그야말로 다시 시작하는 느낌이다. “예전에 제가 받았던 스포트라이트도 사라지고, 예전에는 내가 위에 있었는지 몰라도 지금은 밑이라고, 밑바닥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라는 심영성의 말이 단순한 겸손함이 아닌 이유다.

▲ ‘호랑이’ 김학범과의 특별한 사제관계
“너니까 감독님이 그렇게 하시는거야.” 심영성은 동료들이 그렇게 말할 때마다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김학범 감독의 모습들이지만 동료들이 보기에는 다른 선수들보다 훨씬 더 많이 혼나는 것처럼 보였나보다.
김학범 감독과 심영성의 사제관계는 특별하다. 그는 2004년 성남 일화에 입단하며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성남의 지휘봉을 잡고 있던 이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지금 강원에서 다시 만난 김학범 감독. 제주로 이적하기 전인 2006년까지 호랑이 감독의 불호령을 들으며 이를 악물고 뛰었던 심영성은 임대생과 새 사령탑의 관계로 다시 만난 김 감독이 반가우면서도 못내 불안했다.
“김 감독님이라 더 부담스러웠던 점도 있었죠. 아무래도 예전에 몸이 좋았던 시절의 심영성을 아시잖아요. 지금의 저를 보고 실망하실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감독님이 저에게서 예전의 저를 기대하시지는 않을까 싶었던 거죠.”
심영성은 웃음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그렇게 김 감독과의 재회를 돌아봤다. 천재 골잡이 소리를 들었던 예전의 기억이 문득 살아났다. 하지만 다시 만난 김 감독은 여전했다.
대전전 전날 심영성은 우연히 목욕탕에서 김 감독과 마주쳤다. 김 감독은 심영성에게 짧고 굵은 한 마디를 남겼다. “너무 성급해. 차분하게 해라. 성급하게 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 없잖아.” 6개월이라는 짧은 임대 기간 동안 뭐라도 해야겠다는 심영성의 조바심을 다스리기 위함이었을까. 김 감독은 고개를 푹 숙인 심영성을 지긋이 바라보며 “이제 한 건 할 때 되지 않았냐”고 나지막히 속삭였다. 그 한 마디가 심영성의 마음에 묵직하게 와닿았다.
심영성이 무려 3년 6개월 만의 골맛을 보던 그 날, 김 감독은 옛 제자의 첫 골에도 다른 선수들과 달리 특별한 축하인사를 건넨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길고 긴 터널을 지나 참으로 오랜만에 골맛을 본 제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드디어 한 건 했네”하고 흐뭇한 미소를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심영성에게는 그 한 마디로 충분했다. 뿌듯함이 벅차올랐다.
초심으로 돌아가 리그에 갓 데뷔한 신인처럼 뛰겠다는 심영성의 각오는 단단했다. 6개월 단기 임대지만 그의 목표는 확고했다. “자신이 있었던 팀이 강등되는 것은 선수로서 자존심이 허락지 않아요. 꼭 뭔가 이루고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부진 결심은 농담의 껍데기를 쓰고 튀어나왔다. “감독님께도 농담처럼 ‘남은 6경기 다 이길 것’이라고 이야기했어요. 농담이 아닌 정말이 될 수 있도록, 남은 6경기 모두 이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심영성이 부르는 부활의 노래는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다. 길고 어두웠던 터널을 지나 이제 겨우 다시 빛을 보기 시작한 과거의 천재는 신인 같은 마음으로 그라운드에 설 것이다. 정말 갓 데뷔한 선수처럼 말이다.
costball@osen.co.kr
강원 F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