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모의 테마토크] 비록 MBC ‘백년의 유산’에 1위 자리를 내주긴 했지만 SBS ‘청담동 앨리스’는 화제성이 높고 그만큼 시청자들 사이에서 찬성과 반대의 평가를 동시에 받고 있다. 드라마라는 게 ‘말도 안 돼’ ‘유치해’ ‘어떻게 저런 일이’라고 분통을 터뜨리면서도 그 시각만 되면 후속 얘기가 궁금해 채널을 맞추기 마련이다.
요즘 드라마가 전성기를 맞아 아무리 퀄리티가 높아지고 완성도가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제작여건 상 옥에 티를 줄이기는 힘든 현실이다. ‘청담동 앨리스’도 그런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해 찬사와 비난을 한꺼번에 받고 있다. 대한민국의 특구 강남구 중에서도 최첨단 부의 상징인 청담동을 무대로 일부 편중된 부와 그의 반대편에 선 빈곤층 특히 요즘 젊은이들의 애환을 그렸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더불어 지금까지 봐온 신데렐라 스토리의 전형적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은 그렇고 그런 로맨틱 코미디의 한계에 부닥쳤다는 부정적 판정이 동시에 나오고 있다.
더불어 두 남녀 주인공 장 티엘 샤 혹은 차승조(박시후)와 한세경(문근영)에 대한 평가도 긍정과 부정으로 나뉘고 있다. 이는 극중 캐릭터 뿐만 아니라 연기하는 배우들에게까지 공통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차승조는 굴지의 유통그룹 로열그룹 차일남(한진희) 회장의 장남이다. 하지만 그는 사랑하는 여자 서윤주(소이현)를 얻기 위해 아버지에게 유산상속포기각서를 쓰고 부자의 연을 끊는다.
그런데 윤주는 진정으로 승조를 사랑한 게 아니라 그의 배경을 보고 비즈니스로 접근했던 것. 윤주는 모든 것을 잃은 승조를 단숨에 차버린다. 그러자 승조는 아버지와 윤주에 대한 복수심에 적수공권으로 파리 유학에서 성공해 프랑스의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 아르테미스의 한국지사 회장으로 금의환향한다.
세경은 전형적인 서민집 딸이다. 아버지는 수십년간 빵집을 운영하며 근근이 딸 둘을 키우는 가운데 은행빚을 얻어 간신히 내집마련을 했지만 대형 빵집 체인에 밀려 사업이 망한데다 은행 이자를 감당 못해 결국 아파트를 팔고 셋방으로 이사간다.
그런 집안에서 꿋꿋하게 대학공부를 마친 의상디자인 전공 세경은 공모전에서도 몇 번 입상하고 차석으로 졸업하는 등 실력은 출중하지만 유학을 갔다 오지 못한 핸디캡 탓에 3년간 번번이 취업에 실패한 뒤 지앤의류에 계약직으로 간신히 합격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 여고동창인 윤주가 뽑아준 것. 윤주는 승조에게서 떨어지는 대가로 차일남 회장으로부터 상류층으로 가는 급행티켓을 얻었다. 청담동에서 부유층 사모님의 의상 딜리버러로 일하다가 나이 많은 이혼남인 지앤의류 대표 신민혁(김승수)을 알게 되고 그와 결혼해 청담동 입성에 성공한 것.
윤주는 우연히 신입사원 입사서류에서 꼴찌 점수를 받은 세경의 이력서를 발견하고 자신의 심부름을 해주는 딜리버러로서 1년 계약직으로 합격시켰던 것. 세경에게는 오랫동안 사귀어온 남자친구 소인찬(남궁민)이 있다. 그는 아르테미스에 다니고 있지만 워낙 가난한데다 어머니 병원비 등을 대느라 빚에 몰려 결국 회사 제품까지 빼돌렸다가 회사로부터 고소당한다.
그런 인찬에게 세경의 사랑은 부담이고 이성교제나 결혼은 먼 나라의 사치스런 동화일 뿐이다. 그래서 그는 결국 세경에게 이별을 고하고 브라질로 도망가듯 떠난다. 이 과정에서 세경은 승조에게 상류사회에서는 절대 찾아볼 수 없는 순애보를 보여줘 감동시킨다.
승조는 윤주에 대한 충격으로 세상에 진정한 사랑이란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정신적 트라우마 보유자로 눈물도 흘릴 수 없는 차가운 인물이다. 그런 그가 세경의 순수하고 희생적인 사랑을 보고 세상에는 아직 사랑이 남아있다고 마음이 바뀌는 가운데 세경에게 빠져든다.
승조는 가정적으로 불행했고 사랑에 상처받은 이유로 정상에서 벗어난 정신상태에 있어서 수시로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 집안의 의상은 하나도 흐트러짐 없이 각 잡아 진열해놔야 할 정도로 강박증에 시달리며 사소한 만족에도 세상 다 얻은 것처럼 까르르 요절복통하는 철부지다.
그가 스스로 세경에게 고백했듯 그는 겁쟁이고 ‘찌질남’이다. 하지만 승조가 사랑에 겁내고 인생에 찌질할수록 그의 매력은 더욱 빛난다. ‘오똑하지 오똑하지 오똑하지’라고 세경의 일거수 일투족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는 결코 방정맞아 보이지 않는다.
세경과 차곡차곡 쌓아가는 사랑에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춤을 추는 그는 ‘귀요미’ 그 자체다. 굴지의 기업 회장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다. 게다가 패션감각은 완벽 그 자체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에게나 남에게나 솔직하다. 자신의 과거와 못난 모습을 가감 없이 세경에게 고백하는 모습이나 세경으로부터 사랑을 확인하자마자 그녀를 이끌고 아버지 차 회장 앞에 당당하게 나타나 자신과 결혼할 여자친구라고 소개하는 용감하고 거칠 것 없는 모습은 뭇여성들의 선망의 조건을 완벽하게 충족시켜준다.
이에 반해 세경은 철저하게 위선적이다. 인찬에 대해 그렇게 순애보적이었던 그녀는 인찬이 자신의 통장 전액 500만원을 들고 가버리자 오히려 그것으로 계륵을 처리한 것처럼 시원해한 뒤 청담동에 입성하기 위해 치밀하게 작전을 짠다.
승조는 세경을 자동차 접촉사고로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된장녀인 줄 착각하고 자신을 장 티엘 샤 회장의 비서인 김승조라고 속였다. 그리고 회장님의 부탁이라며 세경에게 샤 회장의 스타일리스트 일을 맡긴다.
이 일을 핑계로 두 사람이 자주 만나는 가운데 승조의 사랑은 확고해지고 김 비서를 통해 샤 회장과 결혼하자는 목표를 세웠던 세경은 김 비서의 인간적인 매력에 빠져간다. 하지만 그녀는 비즈니스를 위해 사랑이란 감정 따윈 거추장스럽다며 김 비서를 마음에서 지우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다가 김 비서가 바로 샤 회장인 줄 알게 되자 사랑과 비즈니스를 동시에 이룰 수 있게 됐다고 안심하면서도 자신이 의도적으로 샤 회장에게 접근하려 했다는 사실을 들킬까봐 전전긍긍한다.
승조의 여린 성격상 만약 세경의 의도를 알게 된다면 예전 윤주와의 아픈 기억이 되살아나 큰 충격을 받을 것이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박시후는 ‘꼬픈남’이란 자신의 별명을 차승조를 통해 더욱 확고히 다지고 있다. 인물 패션감각 집안 직업 등은 완벽하고 다소 정신질환이 있는 듯한 성격이지만 그게 오히려 더 여자들의 모성애를 자극한다. 여자 시청자들은 차승조를 박시후에 대입시켜 최고로 귀여운 남자 배우로 손꼽고 있다.
만약 차승조가 아버지처럼 비즈니스 지상주의였거나, 신민혁처럼 자신의 재산을 무기로 앞세워 나이 어린 신부를 얻었거나, 타미홍(김지석)처럼 돈을 위해 본업인 디자인은 제쳐둔 채 마담뚜 일에 매진했다면 박시후가 이렇게 매력적으로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문근영은 가난한 집안의 딸 한세경을 소화하기 위해 다분히 무너진 느낌이다. 그녀의 패션은 항상 언밸런스하거나 꼭 한 가지 이상 촌스럽고 화면에 잡히는 그녀의 얼굴은 아직도 젖살이 안 빠진 듯 통통해 청담동과는 어울려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소이현이 상대적으로 더 돋보인다.
좋은 배역 하나가 배우의 향후 진로를 좌지우지 하기 마련인데 ‘청담동 앨리스’로 인해 박시후는 많은 것을 얻었고 문근영은 아직도 아역의 틀을 완전하게 깨지 못한 채 답보상태다.
한세경은 착한 여자였지만 그냥 순수하게 노력만 해서는 전형적인 ‘삼포(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세대’의 가난한 틀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는 순간 ‘이상한 나라’에 진입하기 위한 급행열차 티켓을 찾는다.
성공적인 비즈니스를 위해서라면 세경의 남자친구를 빼앗고 그가 그린 그림으로 학점을 따며 의도적으로 승조나 민혁에게 접근해 결국 한 몸 던져 ‘청담동 사모님’이 되는 윤주와 세경은 다를 바가 없다. 결국 세경은 윤주의 ‘시크릿 다이어리’에 적힌 매뉴얼을 따라 ‘검으려면 철저하게 검어라’는 교훈을 밟고 있고 그게 곧 이뤄지기 직전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문근영은 얻은 것보다는 잃은 게 많아보인다. 연예인은 인기를 먹고 살며 배우는 캐릭터로 먹고 살기 때문이다.
[언론인, 칼럼니스트] ybacchus@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