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웅의 야구 기록과 기록 사이]‘1구 승리’를 가능케 하는 몇 가지 멍석
OSEN 홍윤표 기자
발행 2013.04.03 08: 02

지난 3월 30일, SK와 맞붙은 2013 시즌 개막전에서 중간 계투로 올라와 달랑 공 1개만을 던지고도 ‘개막전 승리투수’라는 근사한 훈장을 챙겨간 LG 우완투수 유원상의 일명 로또급 ‘1구 승리’ 진기록은 프로 통산 12번째의 ‘경기 최소 투구수 승리’기록이었다.
‘1구 승리’는 1990년 김청수(롯데)에 의해 첫 기록이 세워지기 이전에는 단 한차례도 나타나지 않았던 진기록으로 근래 들어 투수들의 분업화와 전문화가 세분화되기 시작하며 심심찮게 출몰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선발투수들이 100개가 넘는 투구수를 기록하고도 승리투수의 기록을 얻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판국에 공 1개라는 최소 투자로 승리투수라는 엄청난 수익률을 올리는 현상이 때로는 불공평해 보이고 비상식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세상살이에도 노력이 아닌 복권에 의해서 부(富)를 얻는 일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을 생각하면 이 부분 역시 또 하나의 인생 축소판이라 볼 수 있지는 않을는지.

지금까지 한 경기에서 가장 많은 공을 던졌지만 끝내 승리투수와 연을 맺지 못한 투수는 선동렬(당시 해태)이다. 1987년 5월 16일 사직 롯데전에서 선발로 나와 무려 232개의 공을 뿌렸지만 결과는 2-2 무승부. ‘퍼펙트게임’이라는 영화로도 제작된 고(故) 최동원 선수와의 전설적인 15이닝 완투대결을 벌였던 바로 그날의 기록이다. 참고로 최동원은 이날 209개의 공을 던졌다.
여기에 비하면 1989년 4월 14일 사직 OB전에서 14이닝 동안 219개의 공을 던져 끝끝내 승리투수 기록을 손에 거머쥔 김시진(당시 롯데) 투수의 ‘최다 투구수 승리’기록은 그래도 건진 것이 있어 양반인 셈.
그러면 이처럼 극심한 불균형이 발생하는 승리투수 기록부문에서 하늘이 도와야만 닿을 수 있는 ‘1구 승리’를 가능하게 만드는 요인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그 안을 들여다보도록 한다.
공 1개만을 던지고 승리투수가 되기 위해선 일단 선발투수가 아니어야 한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승리기록을 얻기 위해 발버둥쳤던 선동열, 최동원, 김시진 등, 투구수 잔혹사의 주인공들은 모두 선발투수들이었다. 이는 선발투수는 5이닝 이상 투구해야 승리투수의 자격을 얻을 수 있다라는 기록규칙의 덫이 빚어낸 작품들이다.
다음 조건은 등판시기. 구원투수로 등판했다 하더라도 가급적 경기 종반에 해당되는 이닝에 마운드에 올라와야 한다. 이닝으로 치자면 7회 이후라야 가능성이 높다. 경기 중반에 해당되는 5~6회에 등판해 투구수 1개만을 기록하고 내려갔다면 팀이 경기에서 이겼다 하더라도 승리투수가 될 확률은 그다지 많지 않다. 뒤에 나온 투수들의 투구이닝이 상대적으로 훨씬 많아진다는 것은 투구수 1개가 기록의 전부인 투수에게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요인이다.
지난해 두 차례 쓰여진 ‘1구 승리’ 기록의 주인공들인 최대성(롯데)과 진해수(KIA) 역시 모두 8회 2사 후에 등판해 기록을 챙겨갔다.
그 다음 조건은 등판상황이다. 공 1개만을 던지고 승리투수의 기록을 얻어내기 위해선 흔히 승부처로 표현되는 중요한 상황에 등판해야 보다 유리하다. 주자도 없고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 어려운 상황에 마운드에 나섰다면 투구수 1개는 후속 투수들의 역할에 가려지기 쉽다.
이번 LG 유원상의 경우에도 2-4로 뒤지고 있던 7회말 1사 만루의 위기상황에서 마운드에 올라 최정(SK)을 내야땅볼로 유도, 병살타를 끌어내며 완전히 넘어갈 수 있었던 경기흐름을 틀어막는 무시 못할 공을 세웠기에 이견 없이 ‘승’을 따낼 수 있었다.
만일 유원상이 아무 위기도 아닌 상황에서 그저 공 1개로 아웃카운트 하나를 잡고 이닝을 마무리 지었다면, 그리고 이어 등판한 다음 투수가 나머지 2이닝을 완벽히 처리했다면 유원상의 ‘1구 승리’는 장담키 어려울 수도 있다. LG가 많은 점수차로 역전을 해 2이닝을 소화한 투수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빛을 잃는다면 모를까, 1~2점 차의 근소한 리드를 후위투수가 잘 지켜냈다면 투구수 1개만을 기록한 투수의 기득권은 공식기록원에 의해 훨훨 날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삼척동자도 알다시피 ‘1구 승리’를 완성 짓는데 있어 가장 큰 전제조건은 등판시기도 등판상황도 아닌 리드 점수와 승리다. 적절한 시기와 상항에서 등판했다 하더라도 소속 팀이 돌아선 공격에서 리드 점수를 빼내지 못한다면 모두 허사다. 타자들이 딱 한 번의 공격기회에서 반드시 리드하는 점수를 빼앗아내야 ‘1구 승리’도 가능해진다. 그리고 그 리드가 경기 끝까지 지속되어야 한다. 그래서 ‘1구 승리’는 하늘이 돕지 않으면 결코 얻어내기 쉽지 않은 기록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천우신조 ‘1구 승리’ 보다 한 수 위의 기록이 또 하나 존재한다. 아예 구원투수가 공 1개도 던지지 않고 그 경기의 승리투수로 기록되는 일이다. 이름하여 ‘0구 승리’.
이는 구원투수가 타자대신 루상의 주자를 견제구로 잡아내 이닝을 끝내고, 돌아선 공격에서 팀이 리드 점수를 뽑아내 이겨야만 세울 수 있는 기록이다. 투구수 1개 대신 견제구 하나면 충분하다.
아직 한국프로야구에서는 기록된 바 없는 진기록이지만 메이저리그에는 이러한 기록이 역사에 남아 전해지고 있다. 1906년 닉 앨트락(시카고 W)이 리드 당하고 있던 9회초 2사 만루상황에서 구원 등판해 견제구로 주자를 잡아 위기를 벗어난 후 팀이 9회말에 역전승, ‘0구 승리’를 가져간 바 있다.
그리고 2003년 5월에는 1999년 빅리그에 데뷔해 줄곧 마무리 투수로 활약했던 B.J.라이언(볼티모어 오리올스)이 디트로이트에 1-2로 뒤지던 7회말 2사 1루에서 마운드에 올라 타자 대신 1루주자를 견제구로 잡고, 돌아선 8회초 팀이 역전(4-2)에 성공한 덕분에 ‘0구 승리’의 대박 행운을 챙겨간 일도 있다.
당시 B.J.라이언의 뒤를 이어 등판한 투수 2명이 각각 8~9회를 1이닝씩 나누어 던져 ‘0구 승리’에 대한 공식기록원의 적개심(?)과 경계심을 상당부분 덜어준 덕분에 반사이익을 본 경우로, 만일 뒤에 나온 투수가 혼자서 2이닝을 도맡아 책임졌다면 결과는 알 수 없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야구의 대기록은 리그 역사의 뼈대를 구성한다. 이정표 역할을 하는 굵직한 기록들은 리그의 골격을 잡아준다. 그러나 이것들만으로는 충분치가 않다. 가십성 이야기로 흘릴 수 있는 소소한 기록들과 진기록에 관한 이야기들은 야구역사의 살이 되어 균형 잡힌 근사한 리그 체형을 만들어낸다.
그러고 보니 한국프로야구 역사에 퍼펙트게임 말고도 아직 쓰여지지 않은 기록이 하나 또 있었다. ‘0구 승리투수’. 언제 우리도 그 얼굴을 만나볼 수 있을지 살짝 궁금해진다.
윤병웅 KBO 기록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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