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모의 테마토크] 드라마는 시청자들이 매 회 본방을 사수하기 힘든 특성상 중간에 놓치더라도 흐름에서 이탈하지 않게끔 친절을 베푸는 게 시청률을 지키는 길 중의 하나다. 그래서 밥을 먹으면서 봐도, 한 두 회 빼놓고 봐도 스토리에 어리둥절하지 않기 마련이다.
안방극장이란 특성상 거의 모든 드라마는 멜로 위주로 가거나 특별한 장르의 드라마라 할지라도 멜로를 필수양념으로 첨가한다. 그래야 말랑말랑한 드라마라는 캐릭터를 잘 살려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드라마는 다수의 사람들이 시청하기 쉽도록 내용이 쉬워야 한다. 지나치게 전문적이면 시청자들로부터 외면받는다. 왜냐면 시청자는 지식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휴식을 얻기 위해서 드라마를 시청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SBS 월화드라마 '황금의 제국'은 이런 드라마의 공식을 철저하게 깨뜨린다. 주금납입 유상증자 지주회사 등의 어려운 경제용어는 물론 부동산 전문용어까지 난무해 극에 몰입하다 보면 머리가 지끈지끈해진다. 부동산이나 경제 전문가들이 봐야 할 드라마같다.
게다가 그 흔한 멜로코드를 찾아보기 힘들고 확연하게 구분돼야 할 선과 악의 경계가 애매모호하다. 어찌 보면 출연자 모두 악인이다.
1990년대부터 약 20년간의 한국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 속에서 변해가는 주인공들을 다루다보니 흐름이 엄청나게 빠르다. 잠시 한눈이라도 팔았다간 다음 장면에서 '어!' 하고 놀라기 십상이다.
대사는 더욱 점입가경이다. 동양과 서양의 역사적 인물을 등장시키면서 상황을 빗대는가 하면 각종 고전과 우화를 빌려온다. 중국 근대사의 인물인 마오쩌둥(모택동)과 팽더화이(팽덕회)부터 히틀러의 연인 에바 브라운까지 언급하는가 하면 '황금의 제국'을 차지하기 위한 형제간의 싸움을 조선의 역사에 빗대면서 사도세자를 끌어들인다.
한 마디로 일정 수준의 학력 혹은 전문지식을 갖춘 사람만 보라는 식으로 건방지게 처신하는 드라마다.
그런데 이런 불편하고 불친절한 드라마가 재미있다. 아직 MBC '불의 여신 정이'의 시청률 11.8%에는 뒤진 10.7%로 2위를 달리고 있긴 하지만 이 드라마에 빠진 마니아들의 충성도는 굉장하다. 감상평들이 하나같이 열광하는 내용이다. 왜냐면 이 드라마는 KBS2 '개그콘서트'의 '남자가 필요 없는 이유' 코너의 대사처럼 시청자를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매회 예측 불가능한 반전이 펼쳐지고 각 캐릭터들은 선한 사람 하나 없이 모두 악역이며 출연자들의 흐름에 따른 이합집산은 매번 충격을 줘서 모든 진행이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제목인 '황금의 제국'은 재벌기업 성진그룹이다. 이 성진그룹은 최동성(박근형)과 최동진(정한용) 형제가 일군 회사다. 하지만 최동성은 자신의 자식들에게 재산을 물려주기 위해 최동진의 둘째 아들 최용재(김형규)를 감옥에 보내 그 안에서 자살하게 만들고 부회장인 최동진과 성진건설 대표인 최동진의 큰 아들 최민재(손현주)를 그룹에서 내쳤다.
최동성에게는 최원재(엄효섭) 최정윤(신정미) 최서윤(이요원) 그리고 막내 최성재(이현진) 등 2남 2녀가 있다. 최성재만 제외하곤 나머지는 모두 늙고 병들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의 후계자 자리를 노린다. 그리고 최원재가 먼저 최민재와 결탁해 '왕자의 난'을 일으키지만 유일하게 최동성의 신임을 받는 최서윤에 의해 진압된다.
최원재는 그룹 지분을 확보하기 위해 최정윤을 끌어들여 유상증자에 참여했다가 하루 아침에 재산을 날리고는 결국 최서윤에게 백기투항한다.
최원재가 최서윤에게 붙자 최민재는 자신을 원수로 여기는 장태주(고수)에게 손을 내민다. 아버지를 죽음으로 이끈 최민재를 벌레 보듯 했던 장태주는 이제 자신이 황금의 제국에 입성하기 위해 자신마저 검어지려 한다. 그는 정직하게 살다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돈을 벌기 위해서는 땀을 흘리는 게 아니라 남의 땀을 훔쳐야 한다'는 무시무시한 논리를 앞세워 자신의 인생의 이정표를 정해놓고 최민재와 손을 잡고서 제로섬 게임을 펼친다.
원래 장태주는 최민재에게 테러를 당하고 억지로 그에게 협조하는 듯 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최민재를 엿먹이고 최서윤을 도왔다. 그런 그가 이제는 최민재의 옆에서 최서윤에게 칼날을 겨눈다.
깡패 조필두(류승수)는 최민재의 사주를 받아 장태주의 아버지를 죽인 장본인이고 한때 장태주를 심하게 테러한 반대편의 사나이. 하지만 지금은 장태주의 회사 에덴에 들어와 장태주의 밑에서 일을 하며 그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다. 그리고 조필두의 부하들은 그를 배신하고 최서윤에게로 갔다.
이 드라마에서는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다. 오로지 돈을 위해서라면 철천지 원수와도 결탁하는 게 생존의 논리고 돈의 정의다.
주인공으로서 선한 캐릭터일 줄 알았던 장태주는 알고 보니 가장 악랄한 돈의 노예였다. 그는 돈을 위해서라면 피도 눈물도 정의도 없는 사람이었다.
돈에 물불을 안 가리기는 최서윤도 마찬가지다. 최서윤은 최동성의 주변 인물 중 가장 선하고 올바른 인물로 그려지고 있지만 그녀 역시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하루 아침에 오빠와 언니의 재산을 휴지로 만들고 그들을 무릎꿇게 만드는 얼음장같이 냉혹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마지막 선물로 주기 위해 한 회사를 인수하려는 과정에서 무리수를 두다 성진그룹의 도덕성에 치명적인 상처를 낸다. 그녀는 투명하게 경영하고자 했지만 사실 성진그룹의 태생적 한계가 최동성이 불법과 탈법으로 인수한 회사들로 이뤄진 악의 제국이었던 것이다.
결정적인 반전은 최동성의 아내 한정희(김미숙)였다. 돈을 위해서라면 부모형제도 없는 이 치열하고 살벌한 가정 안에서 유일하게 현모양처로서 따뜻한 인물인 줄 알았던 그녀는 복수를 위해 27년간 자신의 내면을 감추고 가면을 쓰고 살아온 인물이었다. 그녀가 최성재를 임신했을 때 성진그룹의 한 계열사 사장이었던 남편이 최동성을 대신해 죽자 의도해 최동성의 품에 안겨 복수의 칼날을 갈아온 것. 그녀는 임종을 눈 앞에 둔 최동성으로부터 결정적인 비밀을 알아내고, 최서윤을 불러달라는 최동성의 애원을 무시하고 그의 죽음을 두 눈으로 보고 또 회사를 집어삼키기 위해 음모를 꾸민다.
결국 시청자들은 이 드라마를 보면서 겉으로는 마냥 화려하고 행복하기만 할 것 같은 재벌 가족 내부의 추악한 현실을 바라보며 치를 떨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사람이라는 게 다 그렇고 그렇지'라는 대리만족을 할 수 있기에 열광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 드라마는 돈에 눈먼 쓰레기같은 인간들의 돈을 위한 진흙탕 싸움 속에서 자본주의의 부조리와 비합리 그리고 치사한 현실을 꼬집어주기에 서민들은 어렵고 비현실적인 내용임에도, 그래서 불편함에도 그 속에 빠져드는 것이다.
[언론인, 칼럼니스트] ybacchus@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