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두산, ‘사인 훔치기’ 엇갈린 시선
OSEN 김태우 기자
발행 2013.08.04 07: 35

벤치클리어링에 악연이 깊은 두 팀이 오래간만에 충돌했다. 격투기 기술까지 등장했던 예전의 살벌함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 이면에는 ‘사인 훔치기’에 대한 양측의 민감한 시선이 있었다. 한 쪽은 의혹을 제기했고 한 쪽은 아니라며 정면 부인했다.
SK와 두산은 3일 문학구장에서 열린 경기에서 벤치클리어링 상황을 연출했다. 3회초 2사 오재원의 타석 때였다. SK 선발 윤희상이 오재원의 옆구리 쪽으로 초구를 던졌다. 여기까지는 큰 무리가 없었다. 그러나 2구째 빠른 직구가 오재원의 머리를 향하면서 사태가 커졌다. 오재원은 불만을 드러냈고 윤희상도 타석을 향해 발걸음을 옮김에 따라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결국 양쪽 덕아웃이 텅 비는 사태가 벌어졌다.
▲ SK의 의혹, 두산이 사인을 훔쳤다

3회 상황만 놓고 보면 벤치클리어링의 명확한 이유를 알기 어렵다. 상황은 2회부터 시작됐다고 봐야 한다. 두산은 0-2로 뒤진 2회 선두 타자 최준석의 좌월 솔로 홈런으로 반격을 시작했다.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후속타자 홍성흔이 다시 한 번 좌월 솔로 홈런을 터뜨렸고 이어진 타자 오재원마저 오른쪽으로 큼지막한 타구를 뿜어냈다. 역대 22번째 3타자 연속 홈런이 나오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오재원에게 홈런을 허용한 뒤 곧바로 SK의 움직임이 있었다. 오재원이 그라운드를 도는 사이 SK 3루수 최정이 윤희상에게 다가가 뭔가를 이야기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윤희상은 박종철 주심에게 조원우 두산 3루 주루 코치의 위치를 조정해 달라고 요청했고 박종철 주심도 이를 받아들여 조 코치에 지시를 내렸다. 조 코치는 어리둥절한 듯한 몸짓을 지었지만 이를 받아들였다.
결국 최정은 사인이 노출되고 있다는 뭔가의 느낌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러한 최정의 생각은 타자가 포수의 사인을 직접 보기보다는 3루 코치를 통해 전달받고 있다는 의혹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우타자인 홍성흔 최준석은 확인하기 어렵지만 좌타자인 오재원의 시선과 특이한 움직임은 3루수 최정에게 훤히 보인다. 한편 이러한 3루 코치의 위치 조정은 두산 덕아웃에도 “우리가 사인을 훔치고 있다는 의혹을 받고 있구나”라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 사인 훔치기, 어떻게 이뤄지나?
사인을 훔치는 것은 도박판에서 상대의 패를 보면서 베팅하는 것과 같다. 무조건 승리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지만 승리 확률이 그만큼 높아지는 것은 확실하다. 때문에 사인을 훔치기 위한, 그리고 그 사인을 지키기 위한 각 팀의 노력은 지금 이 순간에도 알게 모르게 이어지고 있다. 물론 사인 훔치기는 한국야구위원회(KBO) 대회운영요강에 명시된 금지사항이다. 경기 중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특히 포수의 사인을 훔치는 것은 죄질이 가장 나쁘다. 그러나 대부분 물증은 없고 심증에서 끝난다. 명확한 시비를 가리기 어려운 이유다.
사인 훔치기는 2루 주자가 상대 사인을 간파해 동료 타자에게 전달하는 방식이 보편적이었다. 포수의 사인을 통해 구질을 읽고, 포수의 움직임을 통해 코스를 읽는다면 타격의 성공 확률은 크게 높아진다. 둘 중에 하나만 읽어도 효과가 있다. 투수가 2루 주자의 움직임에 극히 예민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때로는 타자가 포수의 움직임을 직접 확인한다는 의혹에 시달리기도 한다. 손아섭(롯데)도 타격폼의 특유한 시선 때문에 이런 오해를 받았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주자가 없었다. 여기에 포수 사인을 타자가 직접 쳐다보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이런 때는 1·3루 주루 코치를 통해 사인을 전달받는 사례가 프로야구 초창기에 실제 있기도 했다. 자신들만의 약속된 언어로 발을 든다든지, 손을 움직여 상대 사인을 알려주는 식이다. 이런 사인 훔치기를 막기 위해 각 팀의 보안 대책도 나날이 진화하고 있다. 위장 사인은 일상이고 노출됐다고 판단되면 경기 중에도 팀 전체 사인을 바꾸기도 한다.
▲ 오재원의 침착함, 그러나 승자는 없었다
이미 두산 덕아웃에는 2회 상황을 통해 SK의 의혹 제기가 전달됐다. 오재원이 위협구가 날아온 이후 윤희상을 향해 “사인을 보지 않았다”라고 곧바로 부정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두산 선수단도 분위기를 감지하고 있었던 듯 먼저 덕아웃에서 뛰어 나왔다. 다만 심각한 충돌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일단 당사자인 오재원이 감정을 드러내기보다는 의혹에 대한 해명을 했다. 만약 오재원이 마운드로 달려 나갔다면 2007년 한국시리즈 당시보다 더 큰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
가장 먼저 뛰쳐나온 홍성흔도 윤희상을 향해 달려가지 않고 양측의 중재자로 나섰다. 윤희상과 오재원을 떼어놓는 데 치중하는 모습이었다. SK도 최고참급인 조인성과 주장 정근우가 오재원을 말렸다. 사안의 중대성과 위협구를 생각하면 생각보다 불이 크게 번지지는 않았다. 그 후 두산도, SK도 더 이상 서로를 자극하는 일은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경기가 엉망이 될 수도 있었지만 다행히 그런 불상사는 팬들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두산은 “사인을 훔쳤다”라는 의혹을 받았다는 점에서 뒷맛이 개운하지는 않은 경기였다. 공중파 방송을 통해 이런 의혹과 장면이 전파를 타면서 원인 제공자로 몰렸다. SK 역시 불문율을 깨는 위협구를 던졌다는 점에서 이미지의 타격이 컸다. 벤치클리어링은 양쪽 모두에 상처를 남긴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재확인할 수 있었던 하루였다. 경기는 SK가 7-5로 역전승했지만 적어도 이 상황에서의 승자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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