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김범석의 사이드미러] 영화 ‘스물’이 봄 극장가의 유력한 승자로 부각된 건 열중 쉬어 자세를 요구하며 폼 잡는 기존 청춘 영화의 틀에서 과감히 탈옥했기 때문이다. 어떤 일도 할 수 있게 됐지만, 막상 부딪쳐보면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는 나이 스물. 어른도 그렇다고 청소년도 아닌 경계선상의 남루한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따스한 유머와 용기를 속삭이는 감독의 패기와 군더더기 없는 슬림 핏 연출이 제법 잘 포개졌다.
아무래도 청춘의 키워드인 방황과 고민, 기성세대와 현실에 대한 반감 등을 버무리다 보면 십중팔구 우울이라는 함정에 빠지기 쉬운데 ‘스물’은 이를 요리조리 피해가며 밝고 유쾌한 톤을 잃지 않는다. 영화 시작 10분도 안 돼 법적 성인이 된 세 주인공이 첫 섹스를 지상 과제 1호로 삼고 의기투합하는 설정 역시 관객을 쥐락펴락하겠다는 지능적인 접근법이었다. 여기에 ‘이래도 안 웃을 거냐’며 10분에 한 번꼴로 등장하는 코믹 폭탄 대사와 상황은 이 영화의 미덕이자 흥행 뇌관이다.
강형철과 함께 ‘과속스캔들’ ‘써니’ ‘타짜-신의 손’의 대사를 쓴 각색가 출신 이병헌 감독은 비장의 무기처럼 아껴뒀을 촌철살인 대사와 에피소드를 자신의 장편 데뷔작에 한 보따리 풀어놓았다. 자신과 친구들의 실제 경험과 병맛 상상력을 발휘한 덕분에 사건과 에피소드는 리얼하고 생동감 넘친다.
여자 꾀는데 선수인 치호(김우빈)는 중산층 부모에게 빌붙어 사는 백수다. 밤새 클럽에서 놀고 아침에 자는 자칭 역설적 아침형 인간. 소파에서 멍 때리는 게 유일한 낙인 치호의 문제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게 뭔지조차 모르고, 알려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아버지 밑에서 요리를 배우고 연기자 매니저도 해보지만 좀처럼 가슴이 뛰지 않아 일상이 지루하고 갑갑하다.
반면, 만화가가 꿈인 재수생 동우(이준호)는 가난이 원수다. 알바 뛰며 미술학원비 내는 것도 빠듯한데 엄마와 쌍둥이 동생까지 자신만 바라보는 처지. 가족과 연을 끊거나 적당히 현실과 타협해야 하건만 셋 중 꿈을 이루기 위한 의지가 가장 강하고 또 절박하다. 여기에 대기업 입사가 목표인 명문대생 경재(강하늘)는 가장 현실적인 인물이다. 성실하고 반듯하지만 융통성이 부족하고 주사가 가관이며 여자 앞에선 한없이 작아진다.
‘스물’은 고교 졸업 후 직업과 처지가 확연히 달라진 세 친구의 좌충우돌을 속도감 있게 그린다. 치호는 착한 대학생 여친과 엔조이 관계의 여자들, 연예인까지 오가며 진짜 사랑에 눈뜨게 되고, 난생 처음 영화감독이라는 꿈을 발견하며 껍질을 깨기 시작한다. 하마터면 계란 프라이가 될 뻔했던 인생이 부화를 꿈꾸게 된 것이다.
러닝타임 115분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던 건 무엇보다 세 주인공의 플롯과 분량이 균형감 있게 분산 배치된 덕분이다. 누구 하나에 치중하지 않고 칸막이를 뒀지만, 셋의 스토리가 하나의 꼭지점으로 연결되는 듯 한 구성이 돋보였다. 다만, 영화의 구매력을 높이려다 보니 세 남자의 연애와 섹스가 강조됐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여배우들이 죄다 병풍 역할에 머문 것 같아 아쉬웠다.
치호의 오래된 여친 역 정소민과 동우를 짝사랑하는 당돌한 여고생 이유비가 그나마 자주 얼굴을 비쳤지만 회차에 비해 효용이 높지 못 했다. 또 경재에게 기쁨과 고통을 맛보게 하는 동아리 선배 역의 민효린 역시 기량을 발휘하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감독의 편애나 재능 부족이라기 보단 극적 선택과 집중에 따른 태생적 한계였을 것이다.
스스로를 잉여라 여기던 치호에게 처음으로 가슴 뛰는 직업 세계를 발견하게 해준 무기력한 영화감독 역의 박혁권은 조연 활용의 좋은 예를 보여줬다. 연출 데뷔의 험한 가시밭길을 걸었던 초보 감독의 셀프 디스로도 읽혔는데 의외로 큰 웃음이 터졌다. 작년 '해무' 실패 이후 7개월간 웃을 일이 없었던 NEW가 모처럼 미소 짓게 될 것 같다. 15세 관람가로 25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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