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김범석의 사이드미러] 영화 투자사와 제작사 관계자를 만나다 보면 공통으로 나오는 최대공약수 뒷담화 몇 가지가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감독과 배우의 기 싸움과 관련된 이야기다. 감독은 스태프들이 다 지켜보는 앞에서 ‘이렇게 연기하라’고 오더하고, 배우는 ‘여기선 그 감정이 아닌 것 같다. 신 분석을 잘못 하신 것 같다’며 버티는 식이다.
세상에서 가장 에고가 강한 직업인 감독과 이 방면에서 절대 뒤지지 않는 배우가 최소 세 달간 현장에서 매일 부딪치며 협업하는 게 영화, 드라마라는 걸 상기해 보면 그 자체로도 이미 ‘예술’이라는 뼈 있는 농담도 설득력 있게 들린다.
아마도 이런 속성은 자신의 이름을 걸고 끝까지 책임져야 하는 고독한 창작 행위이기 때문일 텐데, 그런 예술적 자존심과 욕심이 보다 나은 작품이 되는데 땔감과 기름으로 사용될 때도 아주 없진 않다. 하지만 간혹 감독의 지나친 에고와 사심이 엉뚱한 곳에서 튀어나와 주위를 민망하게 하고 볼썽사나운 모습을 연출하기도 한다.
가장 흔히 목격되는 감독의 빗나간 오지랖은 다름 아닌 각본 욕심이다. 덜 알려진 전업 작가가 몇 년간 영혼을 담아 쓴 각본을 대사 몇 개 고친 뒤 자신이 썼다고 주장하는 용감한 감독이 여전히 적지 않다. 심지어 기획까지 자기가 한 것처럼 크레딧에 올려달라고 요구하는 막가파도 있다. 자기애가 지나치게 강한 것도 문제지만, 누군가의 공을 가로채겠다는 심보가 더 보기 흉하다.
촬영에 용이하도록 대사와 지문을 손보는 각색 작업에 참여해놓고 버젓이 각본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겠다는 감독은 그래서 더 도덕적 죄질이 나쁘다. 겨우 도배, 장판을 해놓고 ‘이 집 내가 지은 것’이라고 떠드는 것과 다름없는 허풍이자 작가 모독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는 누구보다 창작의 고통을 잘 알고 있는 감독이 원천 소스를 제공한 작가를 은근히 낮춰보는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한 결과이기도 하다.
왜 이런 파렴치한 일이 개선되지 않는 걸까. 어차피 투자, 제작사도 감독을 띄워줘야 홍보 마케팅하기 좋고, 무엇보다 최대 피해자인 작가가 이 일에 적극 나서지 않는다는 걸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적어도 ‘올드보이’나 ‘광해’를 집필한 천만 작가 황조윤이나 히트작 제조기 유영아 작가 정도 되지 않으면 쉽사리 납품 업자 취급을 받는 게 오늘날 시나리오 작가의 슬픈 자화상이다. 조합이나 단체를 결성해 자기 권리를 지켜야 함에도 가장 모래알 소리를 듣는 더딘 집단이 바로 시나리오 작가들 아닌가.
이에 반해 할리우드에선 작가 조합의 파워가 막강할 뿐더러 아카데미나 오스카 시상식에서도 각본상과 각색상을 구분해 작가를 격려하고 떠받든다. 각본상은 오리지널 스크린플레이 어워드(Original screenplay award), 각색상은 어댑티드 스크린플레이 어워드(Adapted screenplay award)로 정확히 나눠 시상하고 있다. 감독과 배우 못잖게 작가를 존경하고 대접하는 건 프랑스, 일본도 마찬가지다.
최근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의 각본을 쓴 신연식 감독과 연출자 김성호 감독의 공동 각본 크레딧 논란도 해묵은 논쟁임에도 여전히 공회전되고 있는 영화계의 어두운 뒷골목 같은 풍경이었다. 작년 7월 개봉한 ‘소녀괴담’의 이종호 작가와 오인천 감독의 불화도 맥을 같이 한다. ‘소녀괴담’은 최근 세계 3대 판타지 영화제 중 하나인 35회 포르투갈 판타스포르토 국제영화제에서 각본상을 거머쥐는 경사를 맞았다.
하지만 축하 받아야 할 수상자 이종호 작가는 두문불출하며 통원 치료를 받고 있고, 감독이 이 영광과 기쁨을 홀로 만끽하고 있다. ‘소녀괴담’은 공포 전문 작가 이종호의 단독 시나리오이며 이 영화를 제작한 고스트픽쳐스의 대표이기도 하다. 자신의 창작 집단 유령의 공포소설에서 오인천을 발굴한 이도 이종호 작가였고, 그를 감독으로 만들어준 사람도 그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촬영 내내 서로 다른 연출관 때문에 현장에서 자주 부딪쳤고 불화를 겪었다. 이종호 작가는 배신감에 화병이 났고, 오인천 감독은 선배의 독선과 간섭이 지나쳤다며 영화 주간지에 작가이자 스승을 디스하는 인터뷰를 해 사태를 악화시켰다.
이번 ‘소녀괴담’의 해외 각본상 수상에 이종호 작가가 아닌 오인천 감독이 나서자 영화계에선 ‘이건 정도가 심하다’는 반응이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억하심정과 억울함이 있든 각본에 참여하지 않은 감독이 무슨 자격으로 작가의 과실에 손을 대려 하느냐는 쓴소리다. 이런 모습이 ‘소녀괴담’ 만큼 공포스럽고, 우리 사회에 형식적인 에티켓마저 실종되는 건 아닌지 서글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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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괴담' 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