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규 감독의 '장수상회'는 조금 위험한 빨간 불이었다.
26일 오후 서울 왕십리 CGV에서 베일을 벗은 이 영화는 노년 커플의 알콩달콩한 사랑이 묵직한 가족애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묵묵히 그려냈는데, 그 과정이 너무나 '착해빠져서' 아쉬움이 컸다.
이 영화의 주된 소재가 주는 메시지의 질감을 제대로 살리기엔 분위기가 너무 현실 위에 붕 떠있는 느낌. 재개발이라는 가장 민감한 대립 구도를 끌고 왔음에도 등장인물들은 너무 착하기만 해서 '남의 나라' 얘기 같다.
그래서 배우들의 깊이있는 연기를 끌어내기에도 역부족. 박근형, 윤여정 등 연기력에 토를 달 필요가 없는 배우들이 등장하지만, 하얗게 표백된 듯 착하기만 한 극중 세상 안에선 연기력을 펼쳐보일 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특히 조진웅, 한지민, 황우슬혜 등이 연기하는 주변 인물들은 입체감을 가질 기회도 거의 없었다.
물론 동화같은 설정을 살리기 위해 이같은 '표백'이 필요했을 수 있지만, 그만큼 후반부 반전이 주는 무게감은 덜해질 수밖에 없다.
영화는 융통성이라곤 전혀 없는 까칠한 노신사 성칠(박근형 분)의 옆집에 소녀같은 금님(윤여정 분)이 이사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 성칠을 설득해 재개발 동의서에 도장을 찍어야 하는 마을 주민들은 성칠이 보다 부드러워질 수 있도록 두 사람의 데이트에 든든한 지원군이 된다.
주인공의 나이와 관계 없이 사랑에 빠진 남자의 소심한 행보는 사랑스럽긴 하다. 다만 재개발에 반대하는 고집불통 할아버지라는 설정이 너무 익숙한 것도 흠이라면 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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