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상회’ 히든카드로 뒤집기 시도하는 최루성 신파 로맨스
OSEN 손남원 기자
발행 2015.03.30 06: 56

[OSEN=김범석의 사이드미러] 주로 대작을 연출, 제작해온 강제규 감독이 황혼 로맨스를 그린 ‘장수상회’를 연출한다고 했을 때 잠깐 귀를 의심했다. 아무리 ‘마이웨이’로 CJ와 정리해야 할 채권 채무가 있다고 해도 ‘쉬리’로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길을 텄던 그가 70대 노인의 사랑 이야기라니. 좀 느닷없었다.
 
뜻대로 일이 잘 안 풀려 한 타임 쉬어가려는 생각이 아니라면 ‘장수상회’에 어마어마한 금맥이라도 매장돼 있는 걸까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그렇지 않다면 천하의 강제규가 CJ가 자체적으로 기획, 개발한 시나리오를 건네받고 연출 의뢰만 수락하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노렸던 건 뭘까.

 
궁금증은 시나리오를 구해본 뒤 단번에 풀렸다. 그도 그럴 것이 ‘장수상회’는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닌, 깊숙한 울림을 내포한 최루성 멜로였다. 왜 저렇게 촌스럽게 포스터를 찍었을까, 왜 영화를 끌리지 않게 마케팅을 할까 아쉬웠던 건 제작진이 이 영화의 ‘한 방’을 감추려는데 너무나 급급해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티슈를 나눠주는 마케팅은 얼마 전 ‘국제시장’에서 써먹은 고루한 아이템 아닌가. 혹시 그때 만들어뒀던 휴지가 재고로 쌓여있던 걸까.
 
‘장수상회’가 개봉 전 ‘스물’처럼 ‘우리 영화 안 보고 못 배길 걸’ 하는 배짱과 자신감이 부족해보인 건 이 영화가 안고 있는 태생적 한계 탓이기도 하다. CJ가 보유한 수 백 편의 라이브러리와 과거 흥행 자료, 통계 데이터를 분석해 대박 요소를 골고루 갖춘 시나리오를 뽑아냈지만, 관객의 우상향된 눈높이는 제대로 감안하지 못한 느낌이랄까.
 
 규격화된 흥행 공식에 맞춰 시간까지 재가며 상황과 기승전결을 세팅한 것 같은 기획 상품 냄새가 나는 건 그래서다. 강제규 감독 정도라면 요리할 때 계량컵과 저울 대신 자신만의 눈대중과 감으로 재료를 다듬고 버무려야 하는데 지나치게 정형화된 인상이었다. 꽤 괜찮은 반전이 있음에도 그 강도와 잔상이 ‘헬로우 고스트’에 못 미쳐 보이는 것 역시 이와 무관치 않다.
 
 초반부 깐깐하고 괴팍한 마트 할배 성칠(박근형)이 옆집으로 이사 온 꽃집 주인 금님(윤여정)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애쓰는 모습은 관객의 팔짱을 스르르 풀게 할 만큼 귀엽고 미소 짓게 한다. 무뚝뚝하고 무심한 것 같지만 내심 여자의 말 한 마디, 손짓 하나에 기뻐하는 남자의 모습은 여성 관객이라면 누구나 좋아할 만한 순수하고 천진한 캐릭터 아닌가.
 
 여기에 동네 청년들의 꿀 팁으로 무사히 첫 데이트를 성공하고 스마트폰도 개통하게 된 성칠. 그녀와 주고받는 문자메시지, 이모티콘 하나에 울고 웃게 된 그는 그러나 금님 옆을 서성이는 한 의뭉스런 노신사 때문에 질투에 사로잡혀 소중한 로맨스를 그르칠 위기에 몰린다.
 
 하지만 그때마다 마트 주인 장수(조진웅)와 직원들, 동네 주민들이 적절한 타이밍에 나타나 성칠을 돕고, 위태롭던 둘의 연애도 결실을 맺을 것처럼 급진전된다. 둘의 연애를 유일하게 반대하는 금님의 딸 민정(한지민)과 숨바꼭질 놀이하는 소녀가 반전의 힌트. 영화는 3분의 2 지점에서 아껴둔 히든카드를 꺼내 관객의 눈물샘을 정조준하기 시작한다. 마치 힘을 비축해둔 마라토너가 어느 시점에서 승부수를 띄우며 치고 나가는 것처럼 영화도 이때부터 가장 빛난다.
 
 과거 작품에 비해 강제규의 연출은 특별히 돋보이지 않지만, 박근형 윤여정의 앙상블은 이 영화의 소소한 단점을 모두 가리고도 남을 만큼 감동적이다. 드라마에서 주로 근엄한 회장님 포스를 풍겨온 박근형이 마트에서 손님들과 티격태격하고 낄낄대는 모습도 흥미롭고, 사랑 앞에서 나이는 역시 숫자에 불과하다는 걸 품격을 잃지 않으며 유머러스하게 잘 표현했다.
 
 대사 한 마디 없이 푹 꺼진 눈동자와 표정만으로 희로애락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진폭 넓은 연기는 볼수록 놀라울 정도다. 데이트 약속을 깜빡한 뒤 알게 된 금님의 투병, 믿기 힘든 자신의 과거에 허망하게 주저앉는 모습 역시 박근형 그 자체였다. 윤여정도 넘침이나 모자람 없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면서도 비극적 딜레마에 빠진 인물을 체화해냈다.
 
 돈과 성공, 그리고 가족. 인생에 정답은 없고 선택만 있을 뿐이라는 평범한 격언은 우리가 어디에 가중치를 두고 이 복잡한 세상을 헤쳐나가야 할지 다시 한 번 일깨워준다. 머뭇거리지 말고 계산하지 말고, 가슴이 시키는 대로 사랑하고 아파하고 끝까지 책임지라고 ‘장수상회’는 말한다. 12세 관람가로 4월 9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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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상회'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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