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분하게, 조곤조곤 설득을 한다. 짐짓 설득력이 있어 보이나 생각해보면 황당한 궤변일 뿐이다. 그럼에도 당황스러운 것은 결국 자신의 아이를 다른 집에 맡기라는 말에 ‘혹’하는 갈대 같은 엄마의 태도다. 연민정처럼 모성애가 부족한 악녀도 아닌데, 이 엄마는 대체 왜 이러는걸까?
지난 30일 오후 방송된 MBC 일일드라마 '압구정백야'(극본 임성한 연출 배한천)에서는 죽은 아들 영준(심형탁 분)의 아이 준서에게 애착을 보이며, 어떻게든 그를 키우고 싶어 영준의 전처 효경(금단비 분)을 설득하는 은하(이보희 분)의 모습이 그려졌다.
효경은 은하가 영준의 친엄마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상황. 은하를 단순히 자신이 믿고 따르는 전 시누 백야(박하나 분)의 시어머니라고만 알고 있는 효경은 준서를 키우고 싶다는 은하의 말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날 은하는 “우리 며느리가 너무 기특하고 예뻐서. 남편 없는 집에 들어와 우리한테 얼마나 잘하는지 모른다. 그러기 쉽지 않다. 오는 정이 있으면 가는 정이 있다고 야야한테 뭔가를 해주고 싶다”며 “시댁 입장을 생각하라. 예쁘고 좋을까? 예뻐하시느냐”고 효경의 아픈 곳을 찔렀다.
“눈총 준다고 하지? 눈으로 쏘는 총이라고 읽었다. 선지 어머니가 준서를 사랑으로 보시느냐?”, “엄마 없을 때 어린 거 눈총으로 볼 수 있고 한 두 마디 타박할 수 있다. 그런 거 생각하다보니 우리가 데려다 키우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는 은하의 말은 황당했지만 효경은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일단 효경이 흔들리기 시작하자 은하의 궤변은 계속됐다. 그는 “알다가도 모르는 마음이 사람 마음이다. 지금은 육선중 화가가 준서를 예뻐하지만, 동생 생겨봐. 엄마도 내리사랑이다. 새로 애 태어나면 걔한테 온 마음이 몰린다”며 아직 생기지도 않은 일을 우려했고, “참한 아줌마, 필리핀 가정부 구하면 영어도 익힐 수 있다. 난 여태까지 남한테 요만큼도 해되게 산 적 없다. 일주일에 한두 번, 매일이라도 와서 들여다보라”며 교육에 대해 약속을 하기도 했다.
앞서 효경은 백야(박하나 분)에게도 비슷한 방법으로 아들 준서를 빼앗긴 바 있다. 물론 동기는 달랐다고 하나, 너무나 쉽게 자신의 아이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효경의 모습은 일반적으로 그려지는 엄마의 태도와 달라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첫 번째는 그렇다 쳐도, 이제는 재혼을 해 어엿한 남편이 있고, 그 남편이 아들을 사랑해주기까지 하는데 아들을 보내야하나 고민하는 효경의 모습은 의아함을 자아냈다.
‘압구정백야’에서 이 같은 대화가 가능한 이유는 작가의 가부장적인 세계관 때문이다. 임성한 작가의 작품에서는 보통의 경우 상식적으로 여겨지는 가치들이, 가부장적인 세계관 앞에서 맥없이 무너져버리고 만다. 따지고 보면 은하가 준서에게 당기는 이유는 그가 아들 영준이 남긴 유일한 혈육이기 때문이다. 또 효경이 준서를 은하에게 보내는 것을 고려하는 이유도 자신의 아들이 가장인 남편의 가족, 시댁 식구들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눈총을 받을까봐서다.
물론, 이 같은 고민이 아예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싱글맘’이 늘어나고 있는 시대에 어울릴만한 이야기는 아니다. 구습으로 인해 개인의 행복(여기서는 아들과 함께 살고 싶은 마음)을 당연한 듯 포기하려는 효경과 같은 사람의 이야기가 과연 요즘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기 위해 쓰인 게 맞는지 의아함을 자아낸다.
한편 '압구정백야'는 방송국 예능국을 배경으로 한 가족 이야기로 평일 오후 8시 45분 방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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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구정백야' 방송화면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