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나이는 신체적 나이를 뜻한다. 하지만 어떤 이는 노쇠한 몸을 지니고도 청춘의 마음을 지니고 살고, 누군가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세월에 지친다. 올해 75세인 배우 박근형은 전자였다. 연기에 대한 고집은 있지만, 사고는 유연했다. 그것이 그의 힘이자, 다시금 전성기를 맞이한 이유였다.
박근형은 현재 영화, 드라마, 예능을 고루 섭렵하고 있다. 오는 9일 영화 '장수상회'(감독 강제규, 제작 빅픽쳐) 개봉을 앞두고 있고, 지난 27일부터 케이블채널 tvN 예능프로그램 '꽃보다 할배 그리스 편' 첫 방송이 전파를 탔다. MBC 수목드라마 '앵그리맘'에도 출연 중이다. 이 정도면 소위 '잘나가는' 스타들의 일정이지만 그는 여전한 갈증을 호소했다.
= 영화 '화장'의 안성기, KBS 2TV 수목드라마 '착하지 않은 여자들'의 김혜자와 장미희 등 중장년, 넓게는 노년 배우들이 최근 활약 중이다. 어떻게 생각하나.
"반갑다. 하지만 극작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소재가 제한적인 편이다. 다른 나라의 것을 보면 무한할 정도로 상상의 세계가 넓다. 예를 들어 소재가 건달이라고 하면, 속된 말로 양아치 같은 어수선함 있고 감동의 여지가 없다. 극의 목적은 단도직입적으로 감동이다. 어떤 형태를 빌려서 하든, 드라마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야기꾼 이야기다. '장수상회'는 노년들의 드라마다. 노배우들, 즉 자원이 얼마나 풍부하나. 우리 자원을 우리 스스로 버리려고 한다. 여기에 우리의 사상을 접합시키면 지금의 한류보다 더 수준이 높아질 수 있다. 여러 세대가 어우러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장수상회'가 잘돼야 한다. 은근히 속으로 기대하고 있다. (웃음) 한국 배우들이 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배역이 많이 왔으면 좋겠다."
=배우로서 욕심이 상당한 것 같다.
"역할에 대한 도전은 언제든지다. 나를 필요치 않아서 부르지 않을 때까지 도전할 거다. 젊은 사람들이 하는 역할을 보면서, 내 나이는 잊고 경쟁적인 구상을 해보기도 한다. 다른 부분은 뒤지더라도 내 분야에 대해서는 가슴이 여전히 뛴다. 예를 들어 SBS 드라마 '하이드 지킬 나'를 보면서 그랬다. 드라마가 대체로 통속적으로 흐르지만, 그렇지 않은 캐릭터를 볼 때 가끔 설레고 욕심난다."
=연기에 대해 이렇게 치열하다. 대선배로서 신인인 엑소의 멤버 찬열과 호흡한 소감은 어땠나.
"신인이지만, 잘 해줬다. 연기를 처음 시작하는 신인들은 종종 잘못된 해석으로 갈 때가 있다. 그래서 상대가 신인이더라도, 같이 하는 동료라면 카메라 앞을 떠나지 않고 똑같이 맞춰준다. 그게 100번이 되더라도 맞춰준다. 그렇게 하면 저절로 실력이 올라간다. 찬열군과도 그렇게 작업했다. 그렇게 해줘서 고맙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고, 다른 작품에서 엉뚱한 연기를 선보이는 사람도 있다. 많이 봐왔다. (웃음)"
=상대역인 윤여정과는 어땠나.
"말할 수 없이 좋았다. 예전에도 작품을 같이 했지만, 윤여정씨가 보통 연기력이 아니지 않나. 두뇌가 아주 명석해서 해석력도, 표현력도 월등하다. 편안했다. 걱정이 전혀 안됐다."
=윤여정과 44년 전 '장희빈'(1971)에서 각각 숙종과 장희빈으로 호흡을 맞췄다. 윤여정은 당시 박근형으로부터 연기에 대한 지적을 자주 받았다고 지난 제작보고회에서 불만을 드러냈다. (웃음)
"그럴 수 있다. 윤여정씨는 재원이다. 선배들의 뜻은 그게 아니지만, 자꾸 지적을 하는 것처럼 들리니까 엄청 싫었을 거다. 나도 신인 때 선배님들이 자꾸 이야기하면 '왜 굳이 저러나' 싶어 반론을 제기했다. 그런 심정이 아닌가 싶다. 그럴 수 있지 싶었다."
=윤여정과 함께 출연하진 않았지만, '꽃보다' 시리즈라는 공통분모가 있다. 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 있나.
"윤여정씨에게 내 여행 이야기를 하면 잘 안 듣는다.(웃음) (윤)여정씨 이야기를 듣는 편이다.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 하는 사람들에게 면박 준 이야기를 주로 한다. 우스갯소리를 정말 잘한다. 마치 '지지배배' 우는 종달새 같아서 '윤종달'이란 별명을 지어주었다. 상당히 진취적인 사람이다."
=중반부 성칠의 집을 몰래 찾은 장수(조진웅)와 뒤늦게 이를 발견한 성칠이 충돌하는 장면이 나온다. 의외로 격한 몸싸움이 벌어진다.
"그게 전환점이 되는 부분이다. 과격하게 표현해야 했다. 감독님에게 '죄송하지만 동작을 크게 해야 겠다'고 했다. 감독님은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고 했다. 연출자는 원래 완성된 그림을 보지 않나. 용납될 만 했는지 다행히 오케이(OK) 해주셨다."
=또 다른 갈등신은 특별출연한 백일섭과 있다. '꽃보다 할배' 인연 때문에 보는 이들에게 웃음을 유발하는 장면이다. 백일섭을 직접 섭외했나.
"백일섭씨가 나올 줄 몰랐다. 촬영하기 2. 3일 전에 알았다. 천만 다행이라고 했다. 백일섭씨와는 형제와 같은 사이다. 촬영하면서 얼마나 웃음이 터졌는지 모른다. 백일섭씨도 웃으면서 했다. 협조해주셔서 감사하다."
=드라마와 연극, 영화는 오랜 세월 해온 것이지만, 예능은 최근에 시작했다. 특히 '꽃보다 할배'는 상당한 인기를 얻고 있다. 어땠나.
"깜짝 놀랐다. 배우는 신비롭게 감춰져 있어야 하는데, 예능은 감춰져 있는 뒷부분을 캐낸다. 선뜻 할 수 없었다. 거절했다. 그런데 소속사 대표가 이건 꼭 해야 한다고 했다. 결정적으로 화를 냈다. 예능에 별로 흥미도 없었다. 그래서 어슬렁어슬렁 따라다니고 평소대로 했는데 그게 갑자기 이야깃거리가 되더라.
='꽃할배' 이후 '근엄한 회장님' 대신 로맨티스트로 불린다. 실제 모습을 알고 있는 가족들의 반응은 어떤가.
"아내는 거짓말이라고 한다. 평소 틱틱 거리는 사람이 어떻게 로맨티스트가 됐느냐고 하더라. 음식 만들어주면 맛없다고 하는 사람인데 밖에 나가면 왜 그렇게 친절하느냐고 했다. (웃음)"
=평소엔 어떤가.
"다른 사람들이 사는 것과 거의 같다. 마음이 똑같을 거다. 어디 가면 아내가 생각나서 선물도 해주고 싶은데, 막상 물건을 사려고 하면 뭘 좋아하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같이 출연했던 분들도 그랬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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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형준 기자 jpnews@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