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김범석의 사이드미러] 요즘 영화계에서 가장 부러움을 사는 이는 ‘국제시장’ 윤제균 감독도, 노총각 탈출한 김용화 감독도 아닌 ‘채 사장’이다. 그는 1998년부터 외화를 수입하고 한국 영화를 제작, 배급, 수출해온 미로비전이라는 문어발 식 중소 영화사를 운영해온 채희승 사장이다.
그의 이름이 모처럼 영화인들 입에 오르내리는 건 최근 관객을 사로잡은 음악 영화 ‘위플래쉬’ 덕분이다. 작년 선댄스영화제에서 약 5천만원(5만 달러)에 사온 이 영화가 이렇게 대박이 날 줄 몰랐던 이들일수록 “채 사장 간만에 계 탔네”라며 부러운 시선을 보내고 있다.
지난 3월 12일 개봉한 ‘위플래쉬’는 2일까지 133만 관객을 불러 모으며 작은 영화의 매운 맛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체급이 다른 형님 영화 ‘분노의 질주’ ‘킹스맨’ ‘스물’에 이어 여전히 박스오피스 4위를 지키고 있어 더욱 놀랍다. 블록버스터가 아니어도 감동과 경이로움을 장착한다면 얼마든지 경쟁력 있는 컨텐츠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또 한 번 입증한 사례다.
이 영화를 배급한 쇼박스는 예상을 상회하는 배급 수수료 수입으로 미소 짓고 있고, 채희승 대표는 간만에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게 됐다. 연세대 경영학과 4학년이던 1998년 미로에서 길을 찾자는 뜻의 미로비전을 설립, 200편이 넘는 외화를 수입해 단맛, 짠맛을 고루 맛본 채 대표는 사실 몇 년간 죽지 못 해 살았던 인물이다. 알아주는 재력가 아들인데다 성공한 축에 속하는 영화인이었지만 그 모든 게 ‘한때’ 과거분사가 된지 몇 년째였다.
단편 '소년기'를 거쳐 박중훈 천정명 주연 ‘강적’을 시작으로 칸 영화제 출품작 ‘하녀’를 제작하기도 했지만 최근 그의 재정 상태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무리한 외화 수입과 환차손, 치킨 게임을 방불케 한 과잉 경쟁, 숨만 쉬어도 나가는 고정 비용이 그의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1억이었던 소박한 빚은 금세 5억으로 괴물처럼 불었고, 잘 때에도 일하는 이자 속성상 10억, 20억이 되는 건 그야말로 시간 문제였다.
영화인들이 오뚝이 채 사장의 이번 흥행 빚잔치를 남 일 같지 않게 축하해주는 건 사람은 역시 죽으란 법은 없다는 걸 그가 인상적으로 보여줬기 때문이다. 빚 독촉에 시달려보지 않은 사람은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전화 벨소리가 얼마나 납량물처럼 다가오는지 모를 것이다. ‘왕의 남자’로 한 방에 부채를 해결한 이준익 감독도 한때 주력했던 외화 수입 때문에 50억이 넘는 빚더미를 이고 살아야 했다.
1억에 수입한 ‘테이큰’이 터지고, 달랑 5천만원에 사온 ‘위플래쉬’가 이렇게 수십억을 버는 효자 상품이 되자 이참에 나도 외화나 수입해볼까 머리 굴리는 이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한국 관객 입맛에 맞는 가성비 좋은 외화를 구매한 뒤 마케팅 비용 3억 안팎만 써서 나도 벤츠 한번 타보자는 심리다.
하지만 수십 년간 외화 수입으로 잔뼈가 굵은 업자들은 이런 생각을 “업계를 모르는 순진한 발상”이라며 나무란다. 정보의 비대칭성 때문에 세상에 싸고 좋은 중고차가 없듯이 영화 마켓에도 싸고 괜찮은 외화는 찾기 어렵다. 여기에 내가 재밌으면 남들도 비슷하게 재밌게 볼 것이고 수요가 몰리면 가격은 절로 올라가게 돼있다.
외화 수입의 또 다른 맹점은 괜찮은 놈 하나만은 절대 안 판다는 사실이다. 바이어 입장에선 돈 될 만 한 똘똘한 외화 한 편만 사고 싶은데 셀러 쪽에선 이거 사가려면 비실한 두 놈도 가져가야 하는 조건을 내건다. 이른바 패키지 판매다. 결국 판돈이 떨어지면 쓸쓸하게 퇴장할 수밖에 없는 카지노처럼 자본력이 뒷받침 돼야 승부수를 띄울 수 있는 곳이 바로 외화 수입 업계다.
채희승 대표처럼 1년의 절반 이상을 해외 마켓에 나가 살고, 외국 감독과 제작사, 프로듀서의 소소한 기념일까지 챙겨야 천재일우 같은 기회를 한번 잡을까 말까한 게 외화 수입업자의 현주소다. 직배사와 메이저 스튜디오 작품은 아예 협상 테이블에 앉지도 못 하고, 그래서 더 박 터지는 경쟁이 펼쳐지는 미들급 이하 마켓에서 귀국 비행기표를 날릴 각오로 덤벼야 계약이 성사될까 말까 하는 정글이 그곳이다.
그래도 간혹 초심자의 행운이 발동해 3천만원에 사온 외화로 3~4억 버는 영화인들이 있긴 하다. 하지만 이건 카지노에 처음 갔다가 룰렛에서 운 좋게 돈을 딴 경우에 가깝다. 이런 운을 마치 자신의 능력인양 착각해 무모하게 딜러와 상대하려 했다간 십중팔구 피똥 싸게 돼있다. 채 대표의 이번 ‘위플래쉬’ 흥행 역시 그가 17년간 쏟아부은 시간과 매몰비용을 떠올린다면 그다지 큰 과실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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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플래쉬'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