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혜 앵커가 6년여 만에 뉴스 데스크 자리에 앉았다. 그가 언론계를 떠나 정치권에 발을 들여 많은 언론인들이 그랬듯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 예상했다. 그러던 어느 날 김은혜 앵커가 MBN으로 복귀해 뉴스프로그램을 진행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반응은 반반이었다.
정치권에 있었던 언론인이 다시 뉴스를 진행한다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이 존재하고 있고 혹시 편파적이지는 않을까라는 우려가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김은혜 앵커가 기자와 앵커로 활동한 17년여의 시간 동안 쌓아온 신뢰와 명성이 있기 때문에 ‘믿음’이 있었다. 김은혜 앵커는 기대했던 대로 소신 있게 뉴스프로그램을 이끌어가고 있다.
이에 김은혜 앵커가 ‘뉴스 앤 이슈’ 마이크를 잡은 후 분위기가 달라졌다. ‘뉴스 앤 이슈’ 전 프로그램 시청률과 비교하면 김은혜 앵커가 오후 뉴스프로그램을 책임지면서 시청률이 상승했다. 기자와 앵커로 오래 활동한 김은혜 앵커는 취재력과 현장의 감, 앵커로서의 전달력 두 가지 장점을 표출해내는데 탁월, 시청률 상승은 당연했다. 그러나 김은혜 앵커는 복귀하기까지 많은 고민이 있었다.
“종편을 보면 볼수록 두렵더라고요. 많은 고수분들이 장악하고 계셨고 아이엄마인 제가 뭘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주부로 한참 생활하고 있어서 말도, 생각도, 인지능력도 전까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한동안의 휴지기가 있어서 굉장히 주저 했어요. 고민도 많이 됐고 내가 지금 가서 뭘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요. 종편 채널을 안 보게 됐어요. 제가 저 자리에서 저분들과 같이 제대로 할 수 있을까라는 의심이 있었죠.”
하지만 계속해서 제안을 받았고 그때부터 김은혜 앵커는 언론인으로서의 사명에 대해 생각했다. 언론인으로서 기본적인 사명은 국민들에게 사실과 진실을 전달하는 것이고 요즘 들어 뉴스가 쏟아지는 뉴스의 홍수시대에서 가장 필요한 뉴스를 전하는 것이고 김은혜 앵커는 그 점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기자로서 17년 일했고 청와대에서 2년 반, 기업에서 3년 3개월 일했어요. 시청자들이 수없이 쏟아지는 뉴스 속에서 어떤 뉴스를 보셔야 하는지, 그리고 뉴스를 이해하는데 제가 보탬이 될 수 있는 일을 한다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 경험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말이죠.”
김은혜 앵커는 언론인이기도 하지만 한 아이의 엄마이기도 하다. 기자, 앵커 직업 특성상 취재에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하는 만큼 나인투식스가 불가능하고 이에 개인적인 시간을 갖기가 쉽지 않다. 이는 곧 아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도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때문에 김은혜 앵커는 아이와 싸우기도 많이 싸웠다. 언론인과 엄마로서의 삶을 완벽하게 사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아이하고 많이 싸웠어요. 아이하고 시간을 보낸 적이 거의 없어요. 청와대 있을 때는 토요일 오전에만 아이를 볼 수 있었어요. 아이가 돌 갓 지난 때라 제가 엄마인 줄 몰랐어요. 토요일 오후에 기자들이 청와대에 나오고 일요일에도 나오니까 제가 공보를 하는 이상 일요일에도 정상출근을 해야 해죠. KT에 있을 때도 공보일은 가족과의 시간보다는 회사 브랜드 가치 혹은 회사를 위해 한분이라도 만나서 노력해야 하는 일이라 가족과 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어요.”
결국 김은혜 앵커는 아이와 함께 하지 못한 잃어버린 시간을 채우기 위해 KT를 나왔다. 아이와 시간을 보내고 추억을 만들기 위해 생각한 건 7살 아들과 배낭여행을 떠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건 실수였다. 목적지 없이 이곳저곳 떠돌며 여행하는 건 7살 아이에게는 감당이 안 되는 일이었던 것.
“아이와 배낭여행을 했는데 기자의 습관이 나왔죠. 기자들은 초단위로 사는데 그렇게 아이를 데리고 다니기 시작한거죠. 그리고 배낭여행이라는 건 20대 고민이 많을 때 하는 건데 발길 닿는 대로 교통수단을 잡아 이동하고 발이 머문 곳에서 자는 건 7살 아이에게 고문이었죠. 그래서 사이가 더 안 좋아졌어요. 관계복원을 위해 한 모든 작업들이 수포로 돌아가고 아이도 ‘애’보다는 ‘증’이 많았어요. 거리두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고민을 하던 때 MBN 등 몇 군데 제안이 있었고 그 제안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어요. 제가 부족한 사람인데 그렇게 계속 요청이 들어와서 ‘내가 고민을 해봐야 하는 건가’라고 생각했고 결국 제안을 받아들였어요. 그리고 결정적인 건 세월호 참사 전후에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가 있었어요. 그 변화와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쏟아지는 뉴스 속에서 무엇을 건져내 내 옆에 세워 같이 길을 걸을 수 있다면, 쑥스럽지만 낯설지만 시청자와 마주할 수 있다면 복귀해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지난해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벌어졌을 당시 어른이라면 누구나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김은혜 앵커도 마찬가지였다. 어른으로서 미안함과 책임감이 컸다. 뉴스에서 세월호 참사를 접할 때마다 가슴으로 울었다. 그리고 그 세월호 참사가 김은혜 앵커가 복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뉴스의 가치를 사람, 공동체, 생명에 두고 이를 더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 그를 움직였다.
“누구든지 얘기하는 ‘가만히 있으라’는 어른의 지시, 어른은 아이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이가 그 지시를 따라야 한다는, 알게 모르게 가지고 있었던 문화 행태와 가치관이 얼마나 어른들만의 생각이었는지를 철저하게 깨는 계기가 됐다고 생각해요. 내가 내 아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지식을 전수하는 게 아니라 아이의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효율성, 경쟁 때문에 공동체, 생명, 사람의 가치를 사람들에게서 한순간에 빼앗았어요. 저도 경쟁하고 남의 어깨를 밟지 않으면 안 되는 치열한 곳에서 살았고 승자독식의 사회에서 살았는데 뒤돌아보지 못했던 건 공동체, 사람, 생명, 사랑이라고 생각했어요.”
당시 가정주부였던 김은혜 앵커가 엄마로서 느끼는 아픔은 컸다. 대부분의 어른들이 그랬듯 김은혜 앵커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한 아이의 엄마로 살면서, 그리고 뉴스와 조금 거리를 두고 살면서 세월호 참사는 김은혜 앵커를 송두리째 변화시켰다. 많은 어른들이 교복 입은 학생들을 보면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고 아이를 좀 더 따뜻한 시선으로 보게 된 것처럼 말이다.
“어른이라는 게 미안했어요. 어른으로 산다는 게 미안했어요. 제가 뉴스 할 때 안이해질 것 같으면 그때를 생각해요. 번개로 맞은 것 같은 그때의 충격, 고민, 아픔을 생각해요. 뉴스도 가급적 사람, 공동체, 생명을 나눌 수 있다면 시청자들이 그것에 대해 조금 더 고민할 수 있게 저도 뉴스를 준비하면서 고민하고 있어요.”
기자로서 시청자들에게 진실을 전달하기 위해 공격적인 취재는 불가피하다. 김은혜 앵커는 17년여 년 간 다양한 뉴스와 특종을 보도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취재하면서 상처를 받기도 하고 상처를 주기도 하면서 직업에 대한 회의감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세상은 넓고 후회되는 일은 많습니다. 제가 기자일 때 저의 기사로 직장을 잃은 분들도 있었어요. 빛과 그림자처럼 기사가 빛을 보아도 분명히 그 그림자로 힘들어하는 사람이 생깁니다. 아무리 명분이 그럴듯하고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이라고 마음을 다잡아도 ‘생명’과 ‘인격체’에 대한 고민이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전 그래서 ‘특종기자’ 보다 ‘믿을 수 있는 사람’로서 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기사는 흘러가지만 ‘어떻게 산 사람이냐’는 지워지지 않으니까요.”
슬럼프가 있었던 것도 당연했다. 슬럼프가 왔을 때 우연히 만난 한 사람이 그를 일으켜 세웠다. 갯벌에서 조개를 캐다 만난 사람이 ‘교시’를 내려줬다.
“앵커일 때도 기업에 있을 때도 공직자였을 때도 가장 큰 고민은 ‘왜 내 진심이 통하지 않을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즈음 우연히 갯벌을 아이와 갔어요. 무려 3시간 동안 입을 다문 조개 하나를 못 캐 ‘엄마 맞아?’라는 자괴감에 쌓여 있을 때 저 멀리서 생업인 듯 조개를 캐시던 분이 입 다문 조개 갈망하던 제게 정말 어른 주먹만 한 백합 조개를 주시더군요. 너무 큰 선물이라 손사래를 치던 제게 50대 초반 돼 보이는 그 분이 정수리를 서늘하게 하는 교시를 내려주셨습니다.‘ 이보게, 남에게 선물 줄 때는 자기가 가진 제일 소중한 걸 주는 거야’라고. 잉여의 개념으로 선물을 간주하던 제게 그 뒤로 슬럼프도 원망도 모두 제게서 발원한 것임을 알게 해줬지요. 그래서 기업에서 제가 마케팅 모토로 쓴게 이겁니다. ‘Perception is reality’현실 인정하고, 진심이 전달 안 되면 그 또한 제 다른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이라 생각하고 나부터 잘하자고요. 그런데 그날그날 고민 있고 힘들 땐 어떻게 하냐고요? 저는 그냥 잡니다.”
17년여 동안 기자에 대한 회의감, 슬럼프를 극복하고 지금의 자리에 오른 김은혜 앵커는 언론인을 꿈꾸는 학생들에게 ‘우상’이다. 방송사 여성 기자로서는 최초로 1994년부터 1999년까지 특종상을 거머쥐었다. 절대 쉽게 얻을 수 있는 영광이 아니다. 때문에 김은혜 앵커 같은 언론인이 되길 바라며 준비하는 학생들이 있다. 그러나 언론 환경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고 언론사에서 언론사 취업예비생들에게 요구하는 자질에도 변하고 있다.
“공유 참여 개방의 ‘인터넷 밀물’로 기자의 역할, 조건, 진입장벽, 모두 전에 없는 변화를 겪고 있죠. 수십 년 안에 인간의 지식 비즈니스 직업 40%가 컴퓨터로 대체될 것이라는 전망을 보더라도 지금은 기자에게 ‘지식’보다는 ‘지혜’와 ‘통찰력’을 요구하는 단계에 와 있습니다. 수만 명의 시민기자, 이 시각에도 휴대폰으로 영상을 SNS상에 찍어 보내는 많은 시민들의 ‘준기자’ 열정은 예비 기자들에게 보다 치열한 전문성과 각오를 주문합니다. 상식과 언어구사 능력, 인터넷의 기술적 활용 등 실무적 준비 외에도 인터넷을 통해 쏟아지는 뉴스와 정보의 맥락을, 중심잡고 파헤칠 수 있는 통찰력과 균형 잡힌 세계관, 세상과 부딪쳐보고 젊을 때의 좌절과 실수를 귀한 자산으로 받아들이는 긍정의 힘을 추천합니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즉, 실수 할 수 있을 때 실수도 해 봐야 기성세대 된 이후 실수를 줄일 수 있다고 봅니다. 저 같은 나이대의 지금 시기는 두 번 실수가 용납되기 힘든 가파른 때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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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형준 기자 jpnews@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