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김치가 되기 위해서 배추는 다섯 번 숨이 죽는다." 요리책에 등장할 법한 문구이지만, 임성한 작가는 자신만의 성찰을 담아 위로와 이별의 대사로 활용했다. 결혼을 약속한 여인에게 이와 같은 말을 들은 남자 주인공은 갑자기 난폭한 사람이 됐다. MBC 일일드라마 '압구정 백야'(극본 임성한, 연출 배한천) 속 황당한 전개다.
지난 6일 방송된 120회에서는 백야(박하나)와 장화엄(강은탁)의 이별이 그려졌다. 육선지(백옥담)의 의도적인 이간질에 휘말린 백야는 진심으로 좋아하는 장화엄 대신 정작가(이효영)을 택했다. 백야의 마음을 확인한 정작가는 장화엄을 불러냈고, 느닷없이 이별 통보를 받은 장화엄은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난동을 피웠다.
백야는 단호했다. 장화엄은 눈물로 호소했지만, 백야는 "정작가는 편안하다"며 "그동안 맞추고 따라가기 힘들다"고 모질게 굴었다. 매달리는 장화엄에게 백야는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차갑게 말했다. 이어 백야는 김치와 배추를 운운했다. 과거 친오빠 백영준(심형탁)을 잃고 고통스러워하던 백야를 위로하기 위해 장화엄이 했던 말이었다.
누구에게나 시련이 있다는 뜻이었지만, 이렇다 할 설명이 없는 상태에선 뜬금없는 대사였다. '임성한 월드'에서 음식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정성이 깃든 음식을 으뜸으로 여기는 상황과 대사가 전작에서부터 반복됐다. 하지만 자못 진지하고 심각한 이별 장면에서 김치와 배추에 대한 비유는 실소를 자아냈다.
덩달아 장화엄의 캐릭터도 엉뚱한 방향으로 변했다. 장화엄은 백야가 떠난 후 난동을 부렸다. 맥주잔을 던지고, 식탁을 엎었다. 깨진 유리조각을 들어 자신의 목으로 가져가는가 하면, 자살 시도를 정작가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극단적인 면모를 보여줬다. 특히 칼을 모자이크 처리했음에도 손에 피가 흥건한 모습은 시청자들에게 놀라움을 주기 충분했다.
당초 120회로 기획된 '압구정 백야'는 현재 29회가 연장돼 총 149회로 종영한다. 백야는 육선지의 말에 장화엄에게 등을 돌리고, 복수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날 홀로 차에서 엉엉 우는 백야의 모습에서 장화엄에 대한 애틋함을 읽을 수 있었다. 다만 임성한 작가는 전작 '오로라 공주'에서 '캐릭터의 붕괴'로 시작해 '황당한 죽음'으로 남자 주인공에게 고난(?)을 안겼다. 이번에도 장화엄 역의 강은탁이 그런 수순을 밟는 것은 아닌지, 그 과정에서 어떤 신선한 대사들을 들려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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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압구정 백야' 화면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