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스 B과장은 왜 거대 배급사에 사표를 던졌을까?
OSEN 손남원 기자
발행 2015.04.07 06: 59

[OSEN=김범석의 사이드미러] 누구나 선망하는 대기업, 그 중에서도 요즘 대학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곳 중 하나인 CJ엔터테인먼트와 쇼박스를 자기 발로 박차고 나온 영화인이 있습니다. 무모해 보이는 주인공은 30대 중반 B 과장. 그는 CJ 배급팀에서 일하다가 경쟁사 쇼박스로 스카우트 돼 최근까지 ‘꽃부서’인 투자팀에서 경력을 쌓고 있던 인재 중 인재입니다.
 훈남 미혼인데다 업무 능력도 탁월하고 대인 관계까지 좋아 주위에 사람이 끊이질 않았는데 특히 부산국제영화제 기간엔 포장마차를 빌려 100여 명이 넘는 또래 영화인들과 단합하는 친선 모임의 리더로도 유명합니다. 마침 이 기간에 B과장의 생일이 끼어있어 술자리는 자정을 즈음해 자연스럽게 그의 생일 파티로 바뀌곤 합니다.
 그런데 지난 달 촉망 받던 B과장이 잘 다니던 쇼박스에 사표를 던졌습니다. 미리 알고 있던 몇몇 측근들을 빼곤 모두 뒷목을 잡을 만한 일이었습니다. 회사 안팎에서 능력을 인정받고 늘 쇼박스에 대한 프라이드가 넘쳤던 그이기에 더욱 충격이었을 겁니다. 결국 쇼박스는 전도유망한  B과장을 설득하지 못 한 채 사표를 수리해야 했습니다.

B과장이 선택한 인생 2막은 다름 아닌 영화 제작. 투자팀에 근무하며 영화 제작자들의 흥망성쇠를 숱하게 지켜봤을 그가 불안하지만 인생 한 방이 있는 개인사업자의 길을 택한 겁니다. 다른 제작사로 출근을 병행하는 보험을 들기는 했다는 군요. 그가 준비 중인 데뷔작이 4억짜리 저예산영화라고 하니 모르긴 몰라도 최근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의 잭팟이 최종 결정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조심스레 추측해 봅니다.
  
어렵게 대기업에 들어온 만큼 임원이 돼 별까지 달아보겠다는 패기 넘치는 직원들이 여전히 많지만, 영화 사업하는 대기업들은 사정이 좀 다른 것 같습니다. B과장 외에도 여기저기서 사표 내고 짐 싸는 모습이 자주 연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쇼박스에선 B과장과 비슷한 시기에 투자팀 S팀장이 자기 사업을 해보겠다며 사직서를 제출했고, 작년엔 P투자 팀장이 회사를 떠나 '동창생'을 제작했습니다. CJ엔터테인먼트도 기획 개발의 귀재로 불린 I 팀장이 최근 투자를 받아 독립했더군요.
중국 통으로 유명한 S팀장은 중국 관련 영화 사업과 국내 투자를 유치해 직접 영화를 제작, 유통할 계획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와 성격은 좀 다르지만, NEW의 투자팀 A 과장도 최근 한국 영화 제작에 뛰어든 워너브라더스 투자팀장으로 발탁돼 이직했더군요. 쇼박스 출신들이 나와 만든 NEW에서 보기 드물게 사표를 낸 사례라 영화계에선 이를 놓고 여러 말이 돌았습니다. NEW가 중국의 화책미디어로부터 대규모 투자를 받고 코스닥까지 입성했지만, 묵묵히 일하는 직원들에 대한 처우 개선은 여전히 부실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그 중 하나입니다. 최대주주와 임원들만 신바람 나는 상황이 평사원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준 것 아니냐는 뒷말입니다.
더 좋은 근무 조건과 비전을 찾겠다는데 응원은 못 해 줄망정 쓸데없는 걱정과 불안한 시선을 보낼 필요는 없을 겁니다. 이럴 때 서로에게 유익한 건 상대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큰 목소리로 재빨리 말해주는 것일 겁니다. “더 있으면 뭐 하냐. 잘 나왔다. 반드시 대박 날 거다. 더 잘 될 거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 방면에서 선배인 CJ, 롯데 출신인 한 중견제작사 J 제작 이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대기업 다닐 땐 몰랐는데 막상 제작사 와보니까 배우, 매니저들한테 엄청 거절 당합니다. 늘 제안하고 부탁하는 게 일인데 대기업 명함의 힘을 뒤늦게 실감할 때도 있어요. 각오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정말 몰랐거든요. 지금은 굳은살이 박였다고 생각하는데 요즘도 거절당할 때마다 상처 많이 받아요.” 천만 영화를 몇 편 제작할 정도로 레벨 높은 제작사가 이 정도이니 다른 영화사 사정은 두 말 하면 입 아플 겁니다.
권불십년 화무십일홍. 아무리 붉은 꽃도 열흘 이상 가지 않는 법입니다. 지난 겨울 제작가협회에서 마련한 사랑방 간담회에서 차승재 대표가 젊은 프로듀서들 앞에서 설파한 내용의 핵심입니다. 이 말을 뒤집어 보면 인생엔 다 적절한 때가 있고, 그 시기를 놓쳐선 안 된다는 뜻으로도 읽힙니다. 달콤한 갑의 명함을 내려놓고 다이내믹한 을의 세계에 진입한 많은 영화계 B과장들의 건투를 빕니다. 그리고 당신들이 지불한 기회비용을 언젠가 꼭 화폐로 보상받게 되길 바랍니다.
 
bskim0129@gmail.com
'동창생' 포스터

Copyright ⓒ OSEN.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