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배우 이순재는 다양한 역할을 맡아왔다. 연기 경력만 60여 년이 다 되가니 그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랜 기간 쉬지 않고 왕성한 연기활동을 해 온 현역배우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착하지 않은 여자들’에서 기 센 여자들 사이 남편으로, ‘돌아온 아버지’로 활약하고 있는 그는 지금까지와는 비슷한 듯 조금 다른 역할로 극에 긴장감을 더해 주고 있다. 착하고 올곧으나 늘 어디로 튈지 모르는 돌발행동을 보여 가족들을 애간장을 태우는 ‘트러블 메이커’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는 것. 이런 이순재, 처음이다.
지난 15일 오후 방송된 KBS 2TV 수목드라마 '착하지 않은 여자들'(극본 김인경 연출 유현기 한상우)에서 과거의 기억을 되찾고 민망한 마음에 가족들을 떠나 버리는 김철희(이순재 분)의 모습이 그려졌다.
이날 김철희는 자신의 아내 강순옥(김혜자 분)과 알콩달콩 좋은 시간을 보냈다. 아직까지 과거의 기억을 찾지 못한 그는 가족들의 애끓는 설득으로 집에 돌아와 그들과 함께 살고 있는 상황. 조금씩 가족들에게 마음을 열고 있는 그는 아내 강순옥과 함께 오목을 두거나 실뜨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과거에도 다정한 남편이었던 김철희는 여전히 강순옥에게 다정했다. 비록, 처음에는 “무서운 여자”라며 아내를 기피했지만 서서히 자신을 챙겨주는 아내에게 좋은 남편으로서의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달달한 애정표현을 요구할 정도. 그는 실뜨기를 함께 하며 자신에게 “기억을 잘 한다"고 칭찬해주는 아내에게 "이럴 땐 그쪽에서 날 뽀뽀해주는 거 아니냐"고 뽀뽀를 해달라고 말해 놀라움을 줬다.
자녀들이 지켜보고 있는 줄도 몰랐던 두 사람은 그렇게 사이좋게 뽀뽀를 했다. 불현 듯 아내의 뽀뽀로 과거의 기억 한 조각을 찾은 듯한 느낌을 받은 김철희는 “기억난다. 내가 반지 사러 갔던 거"라며 "매일매일 뽀뽀하면 다 생각 나겠다"라고 말해 다정한 면모를 보였다.
기억이 깜깜한 상태에서 김철희는 기억을 되찾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강순옥이 챙겨주는 약을 꼬박꼬박 먹었고, 아내와 대화를 하며 기억을 떠올려보려고 애썼다. 심지어 심리 공부를 했다는 이문학(손창민 분)의 도움을 받을 정도였다. 그러나 기억은 엉뚱한 사건을 통해 되돌아 왔다. 기차여행이었다.
김철희는 온 가족이 함께 기차여행을 떠난 상황에서 신나게 춤을 추다가 발을 잘못 디뎌 바닥으로 넘어졌다. 넘어지는 순간, 머리를 부딪친 그는 잠시 누워 기절했고, 그 사이 자신이 기억을 잃기 전 아내를 버리고 장모란(장미희 분)에게 줄 반지를 사 청혼을 하는 등의 불륜을 시도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평소 불륜에 대해 경계와 불편함을 드러내며 비난해 왔던 그는 결국 자신이 그 화살의 주인공이 됐다는 사실을 알고 후회했다. 젊은 시절의 자신을 생각하며 “왜 그랬어 이 못난 사람아”라고 소리를 지른 후 그는 한 번 내렸던 기차에 다시 오르지 않았다. 가족들은 기차에 올라탄 후 역에 그렇게 남은 김철희를 보고 깜짝 놀랐지만, 김철희는 떠나는 기차와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며 가족들을 등졌다. 후회와 미안함이 섞인 도피였다.
이순재는 다양한 작품에서 깐깐하고 대찬 ‘어른’ 역할을 맡아왔다. 그 어른은 때로는 아버지였고, 스승이었고, 대기업의 회장님이었다. 주로 기능적인 역할을 하는 배역들이 많았던 게 사실. 하지만 김철희는 조금 다르다. 그는 자녀들에게 잃어버린 아버지이기 이전에 사랑을 위해 가족을 버린 한 남자였고, 다시 만난 아내에게 능청스럽게 뽀뽀 요청도 할 줄 아는 ‘쿨’하고 다정한 남편이었다. 한 가정 속 평범한 아버지의 모습을 벗고, 사랑을 했고 또 사랑을 하는 남성으로서 캐릭터적 개성이 살아난것. 어린아이처럼 집에 가겠다고 떼를 쓰는 모습이나 죄책감에 가족들의 곁을 아예 떠나버리는 돌발행동에서 김철희라는 캐릭터 고유의 특징이 돋보여 눈길을 끈다.
이처럼 이순재는 오랜만에 입체적인 배역을 맡아 시청자들에게 보는 즐거움을 더해주고 있다. 그간의 역할과는 다소 다른 역할을 맡은 이 베테랑 배우는 앞으로 남은 방송에서 또 어떤 활약을 할까? 기대감을 모은다.
한편 '착하지 않은 여자들'은 뜨거운 피를 가진 3대 여자들의 좌충우돌 성장기를 그리는 작품. 매주 수, 목요일 오후 10시 방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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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하지 않은 여자들' 방송화면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