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서라는 직업에 대한 편견이 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그려지는 비서를 떠올려 보자. 상사의 일정을 관리하거나 뒤치다꺼리는 하는 인물로 대부분 그려진다. 하지만 SBS 월화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극본 정성주, 연출 안판석, 이하 풍문)에선 다르다. 비록 ‘아랫사람’으로 불리지만, 때론 그들의 의중대로 상사를 움직인다. 또한 그들에겐 풍문을 만들고 퍼트릴 수 있는 막강한 힘이 있다. 을은 을이되, 마냥 갑 손바닥 위에 있지 않다.
그 가운데 으뜸은 길해연이 연기하는 양비서다. 양비서는 한정호(유준상)의 아버지가 한송을 운영하던 시절부터 한송에 몸을 담은 베테랑이다. 일본어와 영어 및 복화술에 능하다. 변변치 않은 학벌이지만 30년 동안 근속한 이유도 타고난 영민함 덕분이다. 현재 한정호의 오른팔이자 그의 업무 비서이다. 정확한 판단 능력과 유연한 위기관리, 거기에 유사시 과감함까지 갖춘 그는 대를 이은 비서답게 최고의 실력자다.
양비서의 기지는 지난 21일 방송된 18회에서도 빛났다. 한정호는 사춘기 소년처럼 첫사랑이자 아내의 친구인 지영라(백지연)에게 열렬히 구애 중인 상황. 그의 불륜 소식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이에 아내 연희(유호정)는 우아하지만 처절한 응징에 나섰고, 아들 인상(이준)은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을 대놓고 표현했다. 그럼에도 한정호는 의기양양했다. 지영라에게 낯 뜨거운 문자를 보내는 등 뻔뻔한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나마 한정호는 저지한 이는 양비서였다. 한정호는 지영라와의 해외여행을 꿈꾸고 있었고, 양비서는 한정호에게 지영라 비행기 티켓 취소를 권했다. 한정호와 지영라가 만나자, 양비서는 중요한 사안이라며 둘 만의 시간을 방해했다. 양비서가 한정호에게 내민 서류에는 경고의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양비서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한정호는 어리석게도 이를 외면했다.
늘 그렇듯 양비서의 통찰력은 동료와의 대화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그는 이비서(서정연)와 맥주를 마시며 한정호의 위선, 나아가 남자들의 모순을 속 시원하게 꼬집었다. 과외선생 경태(허정도)의 사죄에 이비서가 흔들리자, 양비서는 “말뿐이다”라며 다잡아 줬다. 앞서 양비서는 사무실 직원 민주영(장소연)과 일본어가 뒤섞인 밀담을 나누는 모습으로 이목을 끌었다. 행간을 읽어보면 모두 뼈가 있는 말들로, 양비서가 지금껏 살아남은 이유였다.
이처럼 ‘풍문’의 즐거움은 풍성한 주변 인물들에 있다. 양비서와 이비서 등 한씨 집안과 관련된 인물의 수는 상당하지만, 그들 하나하나 캐릭터가 살아있다. 때문에 그들이 만들어가는 이야기, 또 그들의 시선에 담겨지는 한씨 집안의 일화들이 흥미롭다. 이는 정성주 작가와 안판석 감독의 공인 동시에 노련한 배우들의 힘이다. 길해연을 비롯해 윤복인, 김호정, 서정연, 전석찬, 이화룡, 김정영, 김학선 등 연극 무대에서의 내공이 만만치 않은 이들로 포진돼 있다. 또한 웰메이드 드라마 ‘풍문’이 흔들림 없이 30회까지 이어나갈 수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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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문’ 방송화면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