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김범석의 사이드미러] 20일 영화 ‘차이나타운’의 김혜수 연기를 보면서 여러 번 심호흡을 해야 했다. 전도연과 더불어 카리스마와 아우라를 겸비한 몇 안 되는 여배우 중 하나인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녀가 이 정도로 스크린을 가득 채울 줄 아는 배우로 성장했는지는 이번에 비로소 실감하게 됐다.
아무런 죄의식 없이 인신 매매와 살인을 교사하는 섬뜩한 범죄 집단의 보스라는 센 캐릭터가 주는 착시일 수도 있겠지만, 그녀가 기미 가득한 얼굴로 등장할 때마다 또는 서늘한 뒷모습을 보여줄 때마다 절로 오금이 저릴 만큼 아드레날린이 객석에 가득 분사됐다. 앞에 앉은 몇몇 여기자들은 극중 김혜수의 잔혹한 범죄 행각이 나올 때마다 귀를 막고 고개를 숙이기까지 했다.
한때 ‘기자님’ 보다 ‘자기야’라는 호칭을 즐겨 사용한 김혜수는 2005년 ‘분홍신’ 개봉 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연기 콤플렉스가 있다고 털어놓아 귀를 의심케 했다. ‘신라의 달밤’ ‘YMCA 야구단’을 거쳐 ‘얼굴 없는 미녀’ ‘분홍신’으로 여배우 원톱 자리를 꿰차기 시작한 김혜수의 예상을 깬 셀프 디스였다. KBS 사극 ‘장희빈’으로 인기 절정이던 2002년 “영화를 하고 싶은데 제작자와 감독들이 잘 불러주지도 않고 공들여 준비한 작품이 엎어지는 일도 몇 번 있어 속상하다”고 토로했던 그녀다.
들어오는 책도 이렇다 할 플롯이나 개연성 없이 남자 주인공을 받쳐주는 역할에 머물거나 섹시한 이미지만 우려먹으려는 캐릭터 일색이라는 푸념도 빠지지 않았다. 워낙 아역 때부터 다져온 연기이지만 비슷비슷한 연기 패턴이 반복되다 보니 경력에 비해 실력이 늘지 않는 배우라는 달갑잖은 평도 돌기 시작했다.
심은하에게 밀리며 흥행 운이 지독히도 따르지 않던 김혜수에게 대박 갈증을 한 방에 해갈해준 작품이 바로 ‘타짜’(06)였다. 당시 그녀는 “배우는 기다려주면 언젠가 보답하는 존재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곤 했는데 이제 그 말에 책임을 질 수 있게 돼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기자가 김혜수를 격이 좀 다른 배우로 보게 된 시기도 그 무렵이었다. ‘타짜’ 성공 후 ‘바람 피기 좋은 날’ ‘좋지 아니한가’로 입지를 굳혀가던 김혜수가 모두의 예상을 깬 차기작으로 컴백했기 때문이다.
문제의 작품은 류승룡 황정민과 호흡을 맞춘 10억짜리 저예산 영화 ‘열한 번째 엄마’(07)였다. 당시 소속사 싸이더스HQ 뿐 아니라 김혜수가 가장 의지했던 박성혜 본부장마저 “혜수씨, 꼭 지금 시점에 그 작품을 해야겠느냐”며 며칠간 논쟁이 옥신각신 벌어지기도 했다. 개봉 후에도 한참동안 우울한 캐릭터에서 못 빠져나올 걸 뻔히 알면서도 시나리오에 매료돼 개런티까지 포기하며 불구덩이에 뛰어든 김혜수가 멋져 보였고 ‘그래 저게 진짜 배우지’라는 존경심마저 들었던 잊지 못 할 일화였다.
상업 무대를 뛰는 프로 배우가 흥행 여부를 도외시한 채 작품을 선별하는 건 일종의 허세이고 직무유기일 수 있겠지만 ‘요거 되겠다, 망하겠다’를 최우선 가치로 두고 작품을 고르는 배우들이 대다수라는 점을 떠올려보면 확실히 김혜수는 좀 다른 노선을 걷는 유니크한 배우임에 틀림없다. 제작비가 초라하고 화려한 CG가 없더라도 심금을 울리고 삶을 반추하게 만드는 텍스트의 힘을 그녀는 여전히 신뢰하며 그런 작품에 아낌없이 자신을 던질 줄 안다.
이번 ‘차이나타운’ 역시 한국 영화 평균 제작비의 3분의 1도 안 되는 작은 영화이지만, 그녀는 자신의 출연료까지 깎아가며 누구보다 먼저 이 프로젝트에 올라탔다. 말만 한국 영화를 사랑해달라고 외치는 게 아니라 저예산에 신인 감독, 여기에 제작사까지 덜 유명한 독립군인 열악한 상황이지만 자신이 뛰어들어 판을 키울 줄 아는 진정성 있는 배우의 면모를 ‘열한 번째 엄마’ 이후 다시 한 번 보여준 것이다.
한국 영화가 언제부턴가 비슷비슷한 공산품처럼 획일화되고 있는 건 투자사의 지나친 자기 검열과 흥행 공식 주입, 그리고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 등이 맞물린 결과일 것이다. 7억 받는 송강호 김윤석이 예산 작은 영화에 개런티를 낮춰 힘을 보탤 때, 스타 감독이 과감하게 신인을 발탁해 배우를 만들 때, 한국 영화 저변은 조금씩 확대될 것이다. 반면, 잘 나가는 감독이 스타 배우를 쓰며 무슨 패거리 집단처럼 자기들끼리 어울리고 키득거릴 때 한국 영화는 승자 독식이 심화되면서 차츰 병들어갈 것이다. ‘차이나타운’에서 보여준 놀라운 화면 장악력과 김혜수의 격이 다른 마인드, 실천이 동료 배우들에게도 옮겨 붙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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