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김범석의 사이드미러] 눈을 치켜뜬 엄마(김혜수)는 어이없음과 냉소를 담아 이렇게 읊조린다. “뭐해? 안 도와주고. 누가 어려움에 처했으면 도와야지.” 악취가 진동하는 인천 차이나타운의 밤 뒷골목. 가엾게 쓰러져있는 개를 보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딸 일영(김고은) 앞에서 엄마는 보란 듯 삽을 사정없이 내리쳐 개의 숨통을 끊어놓는다. ‘너 지금 장난 하니? 싸구려 동정 따윈 개나 줘버려’ 오싹하지만 긴 말이 필요 없는 간단명료한 훈육법이다.
일영은 다행히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터득하는 아이다. 엄마 방식에 토를 달며 돈을 벌어오지 못하거나, 자신의 쓸모 있음을 입증하지 못하면 나도 언젠가 저 개처럼 세상에서 버림받게 된다는 걸 일영은 직감한다. 그래서 가족 중 가장 열심히 엄마가 운영하는 사채회사 마가흥업 명함을 돌리고, 수금할 때도 피를 보는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정성을 다 한다. 물론 엄마에게 가장 높은 마일리지를 얻는 장기 밀매 사업에도 절대 꾀를 부리지 않는다. 그런데 의무감으로 시작한 이 일이 은근히 적성에 잘 맞고, 특히 오빠 우곤(엄태구)과의 넘버2 경쟁에서도 밀리고 싶지 않은 승부욕까지 발동한다.
코인라커 걸. 지하철 보관함에 버려져 노숙자들 손에 자란 잿빛 소녀 일영은 한글을 떼기 전 차이나타운 인신 매매 집단 보스인 엄마에게 팔려온다. 양육이라기 보단 사육에 가깝게 길러졌지만, 일영에겐 비슷한 처지의 오빠와 동생들이 있어 살아야 할 의미를 찾는다. ‘그래 이것도 가족이고 내가 보호받진 못 해도 최소한 내가 지켜야 할 사람들이 있다면 칼을 휘둘러도 된다’는 일종의 방어 기제이자 자기 암시다.
그렇다고 이들이 늘 극악무도한 악행의 어벤져스들인 건 아니다. 가끔은 오갈 곳 없는 중국 동포들에게 가짜 주민증을 제조해 자립 기반을 마련해주고, 급전 아쉬운 이들에게 돈을 대주며 일용할 양식을 제공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일영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할수록 혼란스럽다. 피를 부르는 일이 한탕 끝날 때마다 이름과 주민증이 바뀌는 통에 정작 내가 누군지 모르고 또 알려고도 하지 않는 아이러니가 반복될 뿐이다. 그나마 다섯 식구가 원탁에 둘러앉아 우동과 짜장 면발을 후루룩 넘길 때가 가장 행복하고, 일영은 가족들 모르게 이 모습을 촬영해 간직하려 한다.
그러나 균열은 간혹 어처구니없는 곳에서 벌어지는 법. 수금 작업 중 또래 남자에게 느낀 사사로운 감정에 휘말려 엄마의 의심과 분노를 사게 된 일영은 뒤늦게 사태 수습에 나서지만 한번 발동된 구심력은 일영을 통제하지 못할 만큼 힘이 세진 상황. 급기야 이 과정에서 미필적으로 동생을 죽게 하면서 일영은 엄마에게로 돌아갈 수 없는 루비콘 강을 건너고 만다. 이렇게 슬픈 운명을 예감한 모녀는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애증과 적개심으로 마주하게 되고, 엄마는 자신이 저지른 과거 악행 그대로 죗값을 치르며 구원받게 된다.
‘차이나타운’이 반가운 건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는 황무지나 다름없는 여주인공을 센터포워드로 내세운 영화라는 점이다. 상업 영화가 충무로 토착 자본과 통신사 자본 등을 거쳐 삼성과 대우에 이어 다시 대기업이 판을 짜는 산업화 과정을 겪으며 장르와 소재가 눈에 띄게 병목현상을 보였는데 이 과정에서 가장 많은 피를 본 게 여배우들이다.
투자되는 여배우가 열 명도 채 안 되는 빈약한 모집군은 송강호 하정우를 내세운 ‘안전빵’ 기획에만 매달려온 씁쓸한 제작 현실과 맞물리며 하향평준화 길을 걸었다. 필라멘트와 무비꼴라주 간판을 내리고 아트하우스라는 이름으로 저예산영화에 돈을 대온 CGV가 모처럼 패기있는 여배우 투톱 영화를 내놓았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기센 언니와의 투 샷에서도 좀처럼 밀리지 않은 김고은의 공도 크지만, ‘차이나타운’의 셔터를 열고 닫은 주인공은 역시 김혜수다. 그간 해온 여성성이 강조된 캐릭터에서 벗어나 간만에 서늘하면서 입체적인 연기로 관객의 흥분 지수를 높인다. 기미로 뒤덮인 얼굴과 새치, 보형물로 채운 뱃살 등 외모 변화야 배우의 기본 덕목이지만, 대사와 지문 사이의 어색한 공백이 전혀 감지되지 않을 정도로 화면 장악과 몰입이 수준급이었다. 범죄자로 키우는 딸에 대한 연민과 자기 동일시가 중반까진 전혀 느껴지지 않다가 막판이 돼서야 확인되는데 그 깊숙한 감정과 울림이 폐부를 찌르며 오래도록 잔상에 남는다.
보통 야구는 9명이 하는 경기이지만 관점에 따라 2명이 승패를 좌우한다는 말도 있다. 아마추어 세계로 갈수록 투수와 포수의 중요성이 월등하다는 이야기를 할 때 이 말이 곧잘 애용된다. ‘차이나타운’은 18.84m 떨어져 서로를 응시하고 노려보는 김혜수, 김고은이라는 배터리의 조합과 활약이 얼마나 적중했는지를 보여주는 범죄 드라마다. ‘사이코메트리’ 각본을 쓴 한준희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청소년 관람불가로 29일 개봉되며, 다음 달 비경쟁 부문으로 칸에 입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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