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父情)은 흔한 소재다. 하지만 그만큼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지난 23일 개봉한 영화 ‘약장수’(감독 조치언, 제작 26컴퍼니)도 여기서 출발한다. 아픈 딸의 치료비를 위해 가장은 무슨 일이든 하려고 한다. 그것이 자신의 영혼과 순수를 파는 일이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오갈 데 없는 일범(김인권)은 홍보관에 발을 들인다. 그곳에서 누군가의 부모일 노인들에게 상품을 강매하고, 자신의 양심에 반하는 행동을 한 대가로 돈을 번다. 그만큼 그에게 가족은 중요한 존재다.
배우 김인권과 약장수 일범. 배우와 캐릭터를 연결해주는 키워드는 바로 가족이었다. 김인권은 세 딸을 둔 다둥이 아빠다. 그동안 다양한 캐릭터를 맡았지만, 신기하게도 아빠는 없었다. ‘약장수’의 일범은 그가 만난 첫 아빠 캐릭터였다. 동시에 아빠 김인권을 돌아본 계기였다. 그는 영화 ‘해운대’(2009)를 촬영한 시기 겪었던 아찔한 경험담을 털어놨다. 당시 첫째, 둘째 아이가 동시에 급성 폐렴으로 응급실에 실려 갔다. 응급실에서 최고 위험환자로 분류될 만큼 긴박한 순간이었다. 부산에서 한창 촬영하던 그는 아내의 전화에 부랴부랴 서울로 달려갔다.
“차에서 자면서 애들을 병간호 했다. 그러다 부산으로 촬영을 하러 갔다. 아내가 병원에 있었지만, 마음이 좋지 않았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나’라는 마음이 자꾸 들었다. 기도하면서 촬영장으로 향했다. 결국 아이들에게 좋은 환경을 마련해주지 못한 탓이란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열심히 벌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일범도 그렇지 않나. 아이가 아프니까 결국 자신의 얼굴에 분을 바른다. 나와 그런 연결고리가 있었다.”
그날의 다짐 탓인지, ‘해운대’로 그는 새롭게 주목 받았다. 그는 “메소드 연기는 접고 까부는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고 그 이후를 설명했다. “상업영화에서 배우는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그들이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표현한다. 그것이 배우의 도리”라고 강조했다. 다만 여기서 고민이 하나 생겼다. 대중은 그에게 유쾌한 웃음을 기대하지만, 실제 그는 “웃기는 재주가 있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실제 그렇지 않은 성격이어서 오히려 연기할 때 웃음 포인트를 아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배우로서 갈증도 있었다. 상업영화 속 감초 캐릭터도 좋았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영화”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약장수’가 그런 요구에 부합하는 작품이었다. 그는 돈이란 현실적인 굴레에서 벗어나 촬영에 임한 작품이라고 했다. 또한 홍보관이란 독특한 소재가 그를 잡아끌었다. 그는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블랙코미디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기묘한 상황들에 매력을 느꼈다”고 말했다.
“촬영하면서 외할머니와 고모가 생각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사업실패 이후 외할머니와 고모의 손에서 자랐다. 홍보관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지만, 두 분이 실제 홍보관을 다니셨다. 하루는 고모가 홍보관에서 옥장판 사왔다. 거기 누워서 잤는데 온몸이 간지러웠다. 나중에 따지러 갔더니 몸이 낫는 과정이라고 하더라. 그런 부분이나 생존을 위해 살아오다 가정을 꾸린 후 끈끈한 가족애를 느끼는 모습에서 나와 잘 맞는 작품이란 생각이 들었다.”
‘약장수’를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도 있었다. 그는 홍보관에서 통용되는 ‘엄마’라는 호칭을 언급했다. 홍보관 직원들은 노인들을 ‘엄마’라고 살갑게 부르며, 마치 실제 자식이 못하는 효도를 대신하는 것처럼 보인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효도가 아니라는 점에서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한 경찰 분이 그러더라. 홍보관 직원들을 붙잡아 놓으면, 그 ‘엄마’들이 탄원서를 제출한다고 한다”고 덧붙였다.
김인권의 차기작은 ‘히말라야’다. 올 하반기 개봉을 목표로 촬영 막바지에 달한 상태다. 제작비로 따지면 ‘약장수’와 비교해 상당한 금액이 투입된 상업영화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작품에서 김인권은 박무택(정우)과 형제 같은 존재인 박정복 역을 맡았다. 그는 “산사나이의 느낌을 받으실 것”이라며 “두 인물이 한 인물로 느껴질 정도로 박무택과의 우정이 상당히 끈끈하다. 그들의 왜 산에 가고,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슬픔이 있다”고 예고했다.
“지난 3월 네팔로 촬영을 갔다. 고산병이 왔다. 술에 상당히 취해서 힘든 느낌인데, 정신은 멀쩡한 상태이다. 굉장히 힘들었지만, 해발 4,000m 정도 갔을 때 눈앞에 히말라야 산맥이 펼쳐졌다. 바라보고 있는데 눈물이 났다.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자신과 가족, 또 작품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김인권이 들려주는 고생담은 흥미로웠다. ‘히말라야’가 개봉할 때쯤이면 더 많은 이야깃거리가 축적돼 있을 듯 했다. ‘약장수’ 속 일범이 타협점을 찾듯, 김인권 또한 인터뷰 내내 현실의 무게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저예산 영화와 블록버스터를 오가며 자신의 영역을 구축해 나가는 김인권은 분명 영리한 배우이자 훌륭한 아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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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형 기자 soul1014@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