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충무로는 자성의 목소리가 높다. 다양성을 잃어가고 있다는 지적이다. 그렇기에 재기발랄한 신인감독의 등장은 더욱 고무적이다. 3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스물’의 이병헌 감독이나 평단의 주목을 받은 ‘소셜포비아’의 홍석재 감독 등이 올해 눈여겨볼 신인감독으로 손꼽힌다. 그리고 지난 29일 개봉한 영화 ‘차이나타운’(제작 폴록스픽처스)의 한준희 감독이 이 대열에 합류했다.
‘차이나타운’은 태어나자마자 지하철 10번 보관함에 버려진 소녀 일영(김고은)과 그를 기르는 차이나타운의 지배자 엄마(김혜수)의 이야기다. 범죄드라마라는 장르의 특성을 충실히 따라가면서, 최근 충무로에서 보기 드문 여성 캐릭터를 내세워 차별화를 꾀했다. 말하고자 하는 바는 확실하다. 버려진 사람들의 처절한 생존기. 한준희 감독은 이를 위해 뚝심 있게 마지막까지 밀어붙인다.
작품의 가치는 해외에서 먼저 알아봤다. ‘차이나타운’은 제68회 칸국제영화제 비평가주간에 초청을 받았다. 덕분에 유럽을 처음 가본다는 한준희 감독의 표정과 말투는 덤덤했다. 국제영화제 초청과 평단의 호평은 고마운 일이지만,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영화 그 자체였다. “영화인이란 자긍심은 없어도 자존심은 있다”는 한준희 감독으로부터 ‘차이나타운’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칸의 부름을 받았다. 축하한다.
“감사하다. 기쁘고 좋지만, 영화제는 영화제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만들면서 기쁜 순간도 있지만, 글을 쓰거나 촬영을 하면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나. 스태프들이 열심히 했고, 초청 받았다는 것은 행운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관객들과 만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즐거운 시간은 즐길 생각이다.”
=캐스팅 단계에서 엄마 역의 김혜수가 금방 답을 주지 않았다고 들었다.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김혜수에게 ‘노(NO)’라고 하지 말고 수정고를 기다려 달라고 했다더라. 그렇게 4~5개월을 보냈다. 초조한 시간이었을 것 같다.
“수정고는 배우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작품을 위한 일이다. 캐스팅은 굉장히 중요한 과정이니까 당시에 초조하긴 했다. 동시에 그 시기에 작품이 가야할 방향을 잘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김혜수 선배님에게 고사를 해도 좋으니까 만나서 그 이야기를 듣겠다고 했다. 성격적인 부분인데, 하는 데까지 해보자는 마음이었다. 그래도 이뤄지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고 싶었다.”
=상업영화에서 신인감독이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끝까지 끌고 가는 것이 쉽지 않다. ‘차이나타운’은 감독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제대로 쏟아 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머리 속에는 영화에 대한 그림이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무조건 정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과 똑같이 작품이 나와야 오케이(OK)는 아니다. 같이 하는 배우들이나 스태프들 모두 같은 시대를 사는 중요한 아티스트다. 이 작품을 좋아하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이야기한다면 경청하고 존중하자는 마음이었다. 다만 내가 해야 할 일은 중심을 잡는 것이었다. 어디까지 경청하고, 어디까지 관철시킬 것인가의 문제였다.”
=극중 엄마와 일영 캐릭터는 최근 충무로에서 만나기 힘든 강인한 여성들이다. 그 점이 신선하지만, 준비 단계에서는 위험한 도전이었을 수 있다. 초기 기획 단계에서 주인공을 남자로 바꾸자는 제안들이 있었다고 들었다.
“처음 이 작품을 썼을 때 ‘과연 상업영화 투자가 가능할까’라는 의문이 스스로 들었다. 만약 투자를 받지 못한다면, 독립장편으로 찍자고 생각했다.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어려움도 있었지만, 처음에 왜 이 작품을 하고 싶었는지 생각해 봤다. 남자 주인공으로 바꾸면 더 많은 금액의 투자를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한 분들도 계셨다. 하지만 처음에 원했던 바가 무너진다면, 그렇게 영화를 만들어서 설령 흥행이 된다고 해도 원래 하고 싶은 지향점과 다르다면 그것이 의미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남자로 주인공을 바꾸자는 말에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여성 캐릭터를 내세운 특별한 이유가 있나.
“‘여성이 주인공이면 독특하지 않을까’라는 접근은 아니었다. 전통적인 가치에서 여성은 늘 지키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차이나타운’에서 엄마라는 인물은 생계와 생존을 위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 영화 ‘대부’에서 돈 코르네오네를 비롯한 남자들은 부와 명예를 지향한다. 둘 다 가족을 다루지만, 차이가 있다. 남성은 부와 야심에 대한 이야기에, 여자는 생계와 생존에 대한 이야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차이나타운’ 속 엄마가 돈을 많이 버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생계의 문제다. 만약 남성 캐릭터가 주인공이었다면 그런 귀결로 이어지지 않았을 거다.”
=다른 성(性)에 대해 다루는 것은 어려운 문제다. 어떻게 만들어 갔나.
“‘결국 남자에서 여자로 설정만 바꾼 거 아니냐’는 비난을 듣지 않으려고 많이 고민했다. 또 배우들과 이야기를 많이 하면서 캐릭터를 다듬어 나갔다. 남성과 여성을 떠나서 인간의 가치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면, 보편적으로 접근하는 게 용이하지 않을까 싶었다.”
=영화에 대사가 거의 없다. 인물들에 대한 설명도 없고, 인물들 역시 상황을 설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관객들의 호오가 갈릴 수 있는 지점인데, 작품에 대한 자신감으로 보면 되는 건가.
“자신감은 아니다. 설명되어질 수 없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했다. 인물들의 과거를 설명하는 신은 대사나 플래시백을 통해 어떻게든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인물의 전사(前事)를 꼭 알지 못해도 인상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설명 없이 화면으로 보이는 모습을 통해 사람들이 궁금해 하고, 유추할 수 있는 인물들로 구성했다.”
=그 가운데 석현(박보검)이란 인물이 독특하다. 엄마와 일영 등이 비정한 세계에 속해있다면, 석현만이 그렇지 않다. 자신을 위협하는 사채업자 일영에게 선뜻 친절을 베푼다. 일부 관객들은 남자인 캔디 캐릭터라는 반응을 보인다. 석현은 어떤 의도로 설정된 인물인가.
“복합적인 캐릭터다. 일영에게 거울 같은 인물이기도 하다. 일영보다 상황이 더 나쁜데 항상 긍정적이다. 석현은 일영이란 인물에게 첫 리트머스지 같은 사람으로 그리고 싶었다. 일영은 살면서 굉장히 많이 상처를 입었을 거다. 그런데 석현이 그 상처에 약을 발라준다. 상대방이 남성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가 일영에게 커다란 사건이라고 생각했다. 석현의 세계에서는 당연한 일들, 누가 다치면 치료해줘야 하고 밥을 먹지 않았으면 밥을 해주는 일들이 익숙한 일이지만 일영은 그게 아니었던 거다. 실제 연기를 한 박보검 씨가 굉장히 바른 생활을 한다. 친절과 배려가 몸에 배어 있다. 그렇다고 소위 ‘끼를 부리는 친구’는 아니다. 처음에 박보검 씨에게 ‘석현이의 행동 중 납득이 안되는 게 있느냐’고 물었더니 ‘왜요’라고 되묻더라.”
= 그렇게 석현에게 마음이 흔들린 일영은 그것으로 인해 가혹한 벌을 받는다. 심적인 동요밖에 없었는데, 엄마는 왜 그렇게까지 한 것인가.
“엄마는 곧 차이나타운이라는 세계다. 그 안에는 엄마가 만든 룰이 있을 거다. 내가 아무리 예뻐하는 자식이여도 이 아이를 통제하지 않으면 전체가 무너진다고 생각했을 거다. 심적인 동요뿐이라고 해도, 엄마는 그 이후의 파장까지 알고 있는 사람이다. 일영은 단 한 번의 실수를 하고, 엄마도 그런 일영을 제거하지 않는 실수를 한다. 실수가 곧 성장의 계기가 되는데, 그래서 일영은 물론 엄마의 성장담이라고 생각한다.”
= 영화의 분위기는 비장하지만, 촬영현장은 화기애애했다고.
“촬영현장 분위기가 좋다고 소문날 만큼 좋았다. 주인공인 김혜수 선배님의 경우 톱스타이고 겉으로 보기에 주장이 확실하지만, 작품에 대해 말할 때는 조심스럽게 말씀하셨다. 40회 차를 촬영하는 동안 마찰은 전혀 없었다.”
=영화를 많이 보는 편으로 알려져 있다. 작품의 세계관에 영향을 준 영화가 있나.
“꼭 이 작품을 위해서는 아니고, 시기적으로 2000년대 초반 한국 영화를 많이 보고 자랐다. 임상수, 봉준호, 박찬욱, 김지운 감독님 등 좋은 한국영화를 보고 자랐다. 그런 선배 감독님들의 영향을 두루 받지 않았을까 싶다. ‘차이나타운’에 한해서는 이민자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대부’(1972)나 ‘피와 뼈’(2005) 같은 작품들이 있을 것 같다.”
=31세에 상업영화 감독으로 데뷔했다. 흥행을 떠나 데뷔작으로 칸의 초청을 받기도 했다. 한편으론 부담이 될 수도 있는데.
“영화 쪽 일을 시작한 지 10년이 넘었다. 그동안 느낀 점이 있다면 좋은 일은 기뻐하되, 치우쳐서 안 된다는 것이다. 나쁜 일이 있으면 ‘또 좋은 일이 있겠지’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만들고 좋은 결과, 아니면 나쁜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는 내게 직업이다. 직업이라는 건 좋은 순간도 나쁜 순간도 있다. 힘들다고 해서 영화를 하지 않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할 수 있는 데까지 하고 싶다.”
=‘사이코메트리’(2013) 각본으로 시작해, 직접 쓴 ‘차이나타운’으로 연출 데뷔를 했다. 본인 정체성은 작가와 감독 중 어디에 가까운 것 같나.
“명확한 분류는 어려운 문제다. 이야기가 중요한 사람은 맞는 것 같다. 그 이야기를 가지고 많은 사람들과 함께 영화의 형태로 만들어 가는 과정이 좋다. 영화를 한다고 해서 자긍심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존심은 있다고 생각한다.”
=충무로가 다양성을 잃었다는 지적이 있다. 어떻게 생각하나.
“다양성이 사라졌다는 것은 팩트(fact)인 것 같다. 비단 누구의 책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상업영화의 속성은 돈이 되는 영화를 찍는 것이다. 그런 자본에 대한 책임을 제작진이 인지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야 한다. 대중지향 영화 혹은 작가주의 영화라고 선을 그어 나누기보다는 두 부분을 같이 가져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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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훈 기자 rumi@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