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투자사, 전주영화제 VIP 대접받는 속 쓰린 내막
OSEN 손남원 기자
발행 2015.05.06 07: 31

 [OSEN=전주, 김범석의 사이드미러] 전주는 요즘 봄맞이 행락객과 국제영화제가 겹치면서 가는 곳마다 인파가 북적입니다. 한옥마을은 최고 피크인 8월 부산 해운대 해수욕장을 연상케 하고 웬만한 관광호텔도 전부 만실이라 워크 인 손님을 돌려보낼 정도입니다. 오징어 튀김집과 경주 명물 제과점 앞에도 여지없이 긴 줄이 늘어서 있더군요.
  
이중 전주에서 유난히 귀빈 대접을 받는 이들이 눈에 띄어 흥미로웠습니다. 바로 중국에서 온 영화 투자배급사 페가수스 관계자들입니다. 영화를 사고파는 마켓이 활성화된 부산영화제에 비해 아직 걸음마 수준인 전주영화제에 중국인들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고 방문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페가수스는 비록 흥행은 실패했지만 ‘명량’을 중국에 배급했고, 조인성이 발을 뺀 비운의 작품 ‘권법’에도 돈을 댄 회사입니다. 아직 한국 지사는 없지만 오래 전부터 한국 영화에 많은 관심을 갖고 정보력도 뛰어난 곳으로 유명합니다. 5~6명으로 구성된 페가수스 관계자들은 영화제 측이 제공한 숙소에 여장을 풀고 한 두 시간 간격으로 한국 영화사 대표, 프로듀서들을 만나고 있었습니다. 이 말은 거꾸로 페가수스 관계자들과의 미팅을 원하는 한국 영화인들이 많았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놀란 건 이들이 에어컨도 안 나온 전주프로모션마켓(JPM) 피칭 현장까지 나타나 이 모습을 지켜봤다는 사실입니다. 참신한 시나리오와 극장 상영을 목표로 투자를 연결해주는 JPM에 중국 자본이 참여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는 점에서 이를 의미 있게 해석하는 영화인들이 많았습니다. 한국영화제작가협회 권영락 이사는 “중국 영화인들이 전주를 찾은 것도 낯선 풍경이지만 시나리오만 갖고 투자를 유치하는 단계인 피칭까지 챙기는 건 좀 놀라웠다”고 말하더군요.
  
요즘 중국은 한국 영화인들을 용병으로 쓰는 게 유행입니다. 흥행 여부를 떠나 기성 감독과 스태프는 물론이고 헤어, 메이크업 스타일리스트까지 웃돈을 주고 자국 영화, 드라마에 고용하고 있습니다. 중국에서 자국 배우가 주연인 메이드 인 차이나 영화를 찍으면서 한국 인력을 적극 활용하는 형태입니다. 장비와 자본은 넘쳐나지만 아직 감각과 디테일이 부족한 중국이 한국 영화의 세련된 ‘때깔’을 내기 위한 방편인 겁니다.
아직은 공급에 비해 수요가 부족하다 보니 롯데나 CJ, 쇼박스에서 문전박대 당한 한국 시나리오가 중국에 2000~3000만원에 팔리는 기현상도 심심찮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박시후 윤은혜 주연 ‘사랑 후애’도 100% 중국 자본이 투입된 한중 합작 영화입니다. 허진호 김성수 안병기 이재한에 이어 최근 ‘별 그대’ 장태유 감독도 중국에서 영화를 크랭크 인 했는데 극진한 대접과 지원을 받고 있다는 전언입니다.
문제는 한국식 때깔과 디테일을 어느 정도 마스터 한 뒤 돌변하게 될 중국의 태도입니다. 한국의 유명 감독과 스태프를 활용하며 온갖 노하우와 데이터를 축적중인 중국이 어느 정도 궤도에 돌입했다고 판단하는 순간, 중국 시장만 바라봐온 한국은 찬밥 신세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우리가 한때 너희들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지만, 이젠 우리 실력이 한 수 위’라며 오히려 한국에 수업료 지불을 요구할지도 모릅니다.
 이런 징조는 이미 수치로 증명되고 있습니다. 중국 차이나필름이 투자한 할리우드 영화 ‘분노의 질주’가 중국 박스오피스 기록을 모두 갈아치운 겁니다. 국영 기업 성격인 중국 1위 배급사 차이나필름이 역대 최다 스크린에서 ‘분노의 질주’를 틀었고 관객들이 호응한 결과입니다. 삼성, LG에 발목 잡힌 소니, 노키아처럼 언제든 도태될 수 있다는 위기감에 휩싸인 할리우드는 요즘 중국과 손잡고 달러와 인민폐, 인프라를 적극 공유하고 있습니다.
한국 대학생들이 요우커의 발마사지를 해야 할 시기가 도래하고 있다는 말에 마냥 웃을 수 없는 건 영화, 드라마도 사정이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중국 자본이 우리를 찾는 건 분명히 반가운 일이지만, 돈의 속성상 언젠가 이해관계가 부딪치면 발톱을 드러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이 투자를 하면 자국 배우 출연이 옵션으로 붙을 것이며 수익 배분 비율 역시 차츰 개악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한중을 오가는 레디차이나 배경렬 대표는 “요즘 중국은 콧대 높은 한국 스타를 캐스팅하기보단 서서히 될 성 부른 신인을 자국 영화, 드라마에 기용하며 우리가 한국 신인을 스타로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합니다. 기분 좋지만 듣기에 따라 매우 섬뜩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곳 전주의 명물 비빔밥은 재료 밑에 깔린 밥이 고추장과 버무려져서 나오는 게 특징입니다. 주방장의 손맛과 재료 배합이 관건일 텐데 어딜 가도 비슷한 수준과 맛을 보여줍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전주에서 밥장사한다’는 자부심도 맛의 비결 중 하나일 겁니다. 중국 자본에 젓가락질 당하며 잡아먹힐 것이냐, 아니면 이를 지렛대로 잘 활용할 것이냐는 이제 한국 영화인들의 마음가짐과 각오에 달렸다는 생각입니다.
‘추격자’가 터지니 죄다 스릴러, ‘수상한 그녀’가 대박나니 무조건 심은경 잡자는 곤란합니다. 한동안 외롭겠지만 남들이 안 하거나 못 하는 콘텐츠를 다듬어야 더 돋보이고 큰돈을 만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대기업 투자팀도 봉준호 송강호만 찾을 게 아니라 저평가된 우량주를 옥석 가리듯 찾아내고 ‘약장수’ 같은 작은 영화도 공정한 게임의 법칙이 보장될 때 한국 영화는 중국에 당당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작은 영화를 지키지 못 한다면 그걸 본 남들은 너무 쉽게 내동댕이치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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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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