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연대기’ 꼬리 자르고 도망친 도마뱀의 비극적 최후
OSEN 손남원 기자
발행 2015.05.14 07: 49

[OSEN=김범석의 사이드미러] 내가 죽인 시체가 내 눈 앞에 버젓이 나타났다. 내 직업은 강남서 강력반장. 어이없게도 전 국민이 주목하는 이 사건을 배당받게 되고 후배들 몰래 증거 인멸에 나서야 한다. 사건 현장에서 112까지 눌렀지만 차마 통화 버튼을 누를 수 없었던 건 곧 서울 본청 입성을 코앞에 두고 있어서만은 아니다. 대체 어떤 놈이 나를 노린 건지, 내가 어쩌다 이런 올가미에 갇히게 됐는지 화가 났고 또 궁금했다. 일단 놈을 만나봐야겠다.
 제목부터 거창한 ‘악의 연대기’는 사실 그다지 새로울 게 없는 스릴러다. 사건을 추리하고 범인을 잡아야 하는 형사가 오히려 범행의 주체이고 이를 교묘히 은폐해야 하는 딜레마를 다룬 영화는 그간 수 없이 많았다. ‘추격자’ ‘부당거래’ ‘끝까지 간다’가 이 방면의 성공 모델들. 문제는 얼마나 정교하고 극적인 서사를 펼쳐보이느냐일 텐데 ‘악의 연대기’는 이 점에서 썩 좋지도 그렇다고 퇴행적이지도 않은 미디엄 웰던 수준을 보여준다.
 이런 형사물의 공통점은 주인공이 적당히 부패한 인물로 그려진다는 점이다. 최창식(손현주) 반장 역시 때 묻은 경찰이다. 사건 청탁을 대가로 수천만원의 뒷돈을 받지만 자신을 여기까지 끌어준 선후배들과 흔쾌히 나눠 쓸 줄 안다. 문제가 되더라도 절대 혼자 고립될 일 없는 처세이자 그가 고속 승진할 수 있었던 비결이기도 하다. 그런 최 반장이 회식 후 귀가 도중 택시 기사로 위장한 괴한에게 살해 위협을 당하며 영화는 서서히 복면을 벗기 시작한다.

‘튜브’ 이후 12년 만에 복귀한 감독은 제법 충격적인 비주얼 하나를 투척하는데 최 반장이 우발적으로 살해한 시체를 강남서 앞 공사장 대형 크레인에 매달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범인과 최 반장의 지능대결이 본격화하는 이 장면을 시작으로 영화는 본격적으로 아드레날린을 발산한다. 처음엔 불안, 초조해하던 손현주의 동공 연기는 차츰 분노와 광기로 변하는가 싶더니 처연해지는 단계로까지 레벨 업 되는데 이를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악의 연대기’가 웰메이드 스릴러로 분류되긴 어렵지만 그래도 볼 만한 형사물로 안착할 수 있었던 건 이 같은 손현주의 심도 깊은 연기 덕분이다. SBS 드라마 ‘추적자’(12)에서 딸의 죽음 뒤에 감춰진 진실을 파헤치는 강력계 형사 백홍석을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악의 연대기’가 나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끝까지 간다’ ‘더 테러 라이브’ 정도의 완성도와 긴장감, 위트를 기대한다면 주말 9000원은 생각보다 아까울 수 있겠다.
손현주를 받쳐주는 조연 3인방 마동석 최다니엘 박서준은 모두 개런티 이상의 흠잡을 데 없는 연기를 보여준다. 최 반장의 오른팔 오 형사 역의 마동석은 형사 버디물이라 불러도 무방할 정도의 케미를 보여주는데 극이 느슨해질 때마다 나타나 적재적소에서 웃음과 몰입감을 책임지는 브릿지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마동석이 다작하면서도 자신의 상품성을 높여가는 건 오버하지 않고 매번 진지한 태도로 연기에 임하기 때문일 것이다.
마약 사건에 연루돼 연예계에서 퇴출된 전직 배우 역의 최 다니엘도 자신이 진범이라며 자수한 뒤 오히려 수사진을 혼란스럽게 하는 베일에 싸인 인물 진규로 나와 긴장감을 높인다. 여기에 최창식이 신뢰하는 강력반 막내 차동재 형사를 연기한 박서준도 연식에 비해 안정감 있는 연기로 우려를 불식시킨다. ‘악의 연대기’에서 유일하게 오디션을 거치지 않고 캐스팅 된 그는 발탁 과정에서 투자사의 낙하산 논란이 있었지만 겸손과 실력으로 이를 극복해낸 케이스다.
그럼에도 ‘악의 연대기’는 스릴러로서 몇 가지 치명적인 약점을 노출한다. 대표적인 게 최 반장을 코너로 몰기 위해 제 발로 자수한 진규의 태도다. 수사력을 흩뜨리는 동시에 최창식에게 또 다른 악을 직접 처단하라며 거래를 제안하는데 이 과정이 다소 작위적이며 헐겁게 다가온다. 게다가 혐의 없음으로 풀어달라고 요구하는 설정 역시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밑밥으로 등장한 동성애 코드도 과욕으로 비쳐졌다.
관객 수준이 높아지는 만큼 반전에 반전을 거듭해야 하는 창작자의 고통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보다 정교하고 개연성 있는 각본, 각색이 아쉬웠다. 스릴러의 서스펜스와 묵직한 공기를 웃음으로 환기해내는 장치인 여유와 위트에 인색했던 점도 12년의 공백을 한꺼번에 메우려는 감독의 조급증으로 읽혔다. 감독과 주연배우, 제작자가 모두 중앙대 연극영화과 선후배 사이다. 15세 관람가로 14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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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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