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신’ 광기의 연산군과 미쳐 날뛰는 측근의 불협화음
OSEN 손남원 기자
발행 2015.05.19 08: 13

[OSEN=김범석의 사이드미러] 역사는 붓을 든 자가 어느 쪽에 발을 딛고 서있느냐에 따라 180도 달라진다. 위화도 회군으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정치적 모순을 해소한 승자로 추앙받지만, 고려 충신들 입장에선 정반대의 인물로 서술될 뿐이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헤게모니를 쥔 쪽이 잊지 않고 정치 보복에 나서는 이유는 바로 이 기록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지 모른다.
 이런 점에서 충신과 간신도 한 끗 차이다. 권력을 잡은 쪽에 속한다면 충신이지만, 잃은 쪽에 복무했다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간신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영화 ‘간신’(민규동 감독)은 조선을 통틀어 가장 콤플렉스가 많았던 연산군 11년, 채홍사로 근무한 한 신하의 이야기다. 요즘으로 치면 청와대 민정수석쯤 되는 인물이다.
아비 사홍(천호진)의 피를 물려받아 선천적으로 욕심과 꾀가 많은 숭재(주지훈)는 어릴 때 친구처럼 지낸 연산이 왕위에 오르자 고속 승진한다. 권력의 달콤함에 서서히 취해가던 그는 자신을 견제하는 요부 장녹수를 제거하기 위해 조선 팔도를 뒤져 1만명의 미녀를 선발하는 채홍을 거쳐 운풍이란 이름으로 왕에게 상납한다. 이도 모자라 기쁨조 중 경국지색인 단희(임지연)를 골라 왕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각종 비법을 전수하지만 이에 맞서는 장녹수(차지연)의 반격 역시 만만치 않다.

소문난 신장개업집, 막상 먹을 게 없다지만 ‘간신’은 예외가 될 듯싶다. 19금 에로틱 사극답게 남녀 합방신의 수위가 세고 거칠고 때론 난폭하다. 첫 소개팅 한 남녀가 아무 생각 없이 ‘간신’을 골랐다면 급속도로 가까워지든가, 아니면 남자의 안목 부족으로 애프터에 실패할 확률이 높을 수 있겠다. 물론 웃음으로 버무린 쉬어가는 코너도 준비돼 있지만, 결승전으로 불린 단희와 라이벌 설중매(이유영)의 격투에 가까운 정사 경연신은 잔상에 오래도록 남을 만큼 임팩트가 강하다.
감독과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08)로 인연을 맺은 주지훈은 천년 이래 으뜸가는 간흉으로 기록된 실존 인물인 최악의 간신배 임숭재를 능수능란하게 소화해낸다. 최근작 ‘좋은 친구들’에서 다소 미흡한 모습을 보여 아쉬움을 자아냈는데 이를 만회하겠다는 각오가 2시간 내내 읽힌다. 면전에선 왕을 떠받들지만 뒤에선 왕을 쥐락펴락 하겠다는 권력 지향형 이중적 인물. 태양에 다가갔다가 촛농으로 만든 날개가 녹아 추락하는 이카루스가 연상될 만큼의 호연이었다.
백정의 딸이지만 신분을 세탁해 운풍에 들어가는 단희 역의 임지연도 전작 ‘인간중독’에 뒤지지 않는 강도 높은 노출 연기를 보여준다. 그녀가 왜 그토록 연산의 품에 안기려 하는지 후반부에 나오지만, 이 과정에 대한 설명은 다소 불친절하고 개연성도 부족해 보인다. 하지만 사람을 끌어당기는 임지연의 묘한 눈빛과 중저음 목소리 덕분에 단희 캐릭터를 따라가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다.
 왕에게 간택받기 위해 운풍을 훈육하고 경연하는 과정과 에피소드가 장시간 등장하는데 오락적 흥미 요소로는 훌륭하지만 여성 관객이 얼마나 관대하게 봐줄지는 미지수다. 주색잡기에 빠진 연산군의 실정을 강조하기 위한 방편이겠으나 신체검사부터 잠자리 방중술까지 다소 불편할 수 있는 대사와 장면이 나온다. 연산과 돼지 무리의 기묘한 앙상블 역시 두고두고 회자될 문제적 장면 중 하나다.
 장점이 많지만 ‘간신’이 간과한 함정은 감독이 지나치게 고품격 에로틱 사극을 표방하다 보니 안타고니스트를 적절하게 활용하지 못했다는 점에 있다. 충신들을 쫓아내고 부녀자까지 닥치는 대로 왕에게 바쳐 총애를 받은 숭재를 권력욕에 취한 극악무도한 인물로 그리지 않고 그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연과 단희와의 애절한 멜로 라인까지 끼워 넣다 보니 뒤로 갈수록 극적 긴장감이 가중되지 않았다.
 어미 폐비 윤씨의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에 미쳐가는 연산과 궁에 들어가 해야 할 미션이 있는 단희, 그 누구에게도 쉽게 감정을 이입할 수 없다보니 시간 안배가 잘 된 기승전결과 시각적 쾌감이 있는 영화임에도 중간 중간 몰입이 깨지는 느낌이 들었다. 또 캐스팅을 위한 조건부 각색의 결과이겠으나 각 인물에 대한 히스토리를 보강하고 이런저런 딜레마와 사연을 누더기처럼 덧씌우다 보니 이야기가 힘 있게 한 축으로 집중되기보다 부챗살처럼 분산돼있다는 인상도 받게 된다.
 호평 받고 있는 ‘매드 맥스’와 ‘악의 연대기’가 탄력을 받은 상태로 넘어오고 ‘스파이’도 만만찮아 대진 운이 좋지 않지만, 성인 타깃 오락물로선 괜찮은 수준이다. 청소년 관람불가로 21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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