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에게 이미지는 양날의 검이다. 자신만의 특별한 영역을 만들어 내는가 하면, 고정된 이미지에 발목을 잡히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배우 고아성은 풍성하면서 영리한 필모그래피를 자랑한다. 영화 ‘괴물’(2006) ‘설국열차’(2013) 등 세계적인 관심을 받은 대작들부터, 영화 ‘여행자’(2009) ‘우아한 거짓말’(2013) ‘오피스’ 등 중저예산 영화, 방영 중인 SBS 월화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이하 풍문)를 비롯해 KBS 2TV 드라마 ‘공부의 신’(2010) 등 드라마까지 다채롭다.
제68회 칸국제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 부문에 초청된 영화 ‘오피스’(감독 홍원찬, 제작 영화사꽃) 또한 새로운 도전이었다. 그가 맡은 역할은 식품회사 영업팀 인턴 이미례. 지나치게 평범한 나머지 우직하게 열심히 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도리가 없는 인물이다. 어느 날 같은 팀의 김병국 과장(배성우)이 자신의 가족을 잔인하게 살해한 후 사라지고, 그 이후 팀원들이 하나씩 실종된다. 이미례는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는 인물로, 후반부 강렬한 반전을 선사한다.
지난 19일 새벽(현지시간) 프랑스 칸 뤼미에르 극장에서 공식상영을 진행한 ‘오피스’는 뜨거운 반응을 얻었지만, 정작 고아성은 “혼란스럽다”는 솔직한 소감을 내비쳤다. 차분한 말투에 조심스러운 태도에서 신중한 성격을 엿볼 수 있었다. 세계적인 영화제인 칸국제영화제를 찾아 지중해를 배경으로 삼아 국내 취재진과 인터뷰를 진행하는 상황에서는 들뜨는 법이 없었다. 어른스러운 면모 때문인지 의지가 되는 사람으로 엄마뻘인 틸다 스윈튼을 꼽은 것은 자연스러워 보였다.
-공식상영, 포토콜, 국내외 취재진과 인터뷰 등 일정을 모든 마친 후 계획이 있나.
“개인적으로 만날 사람들이 있다. 알고 지내는 신인 감독님이 있다. 일로 만난 사이는 아니고, 지인을 통해 알게 됐다. 또 단편영화로 칸에 온 대학동기가 있어 친구들을 만날 생각이다. 예전에는 혼자 칸에 왔다면, 이제 아는 사람들이 생긴 것 같다.”
-아역배우 시절에는 송강호나 봉준호 감독 등 어른들과 함께 영화제를 찾았다면, 이제 주연배우로 한 작품을 대표하고 있다. 이번 칸영화제 방문이 특별할 것 같다.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부분이다. 누구랑 가든 내 역할을 해내는 게 목표다. 크게 달라진 점은 없다. 그동안 해외영화제를 자주 갔던 건 도움이 됐다. 사실 국내영화제는 딱 한 번 가봤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가 처음이었다. 계속 해외영화제만 다녔는데, 국내영화제 보다 해외영화제가 편한 것 같다. 모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가 하면 인맥이 참 다양하다. 봉준호 감독이나 송강호부터 또래 배우들까지 주변에 많은 사람이 있다.
“그래도 자주 보는 사람들이 반갑다. ‘설국열차’를 함께 한 틸다 스윈튼을 이상하게 자주 본다. 1년에 두 번씩 보게 된다. 내가 영국에 가거나 그가 서울에 올 일이 생긴다. 그때마다 서로 연락을 해서 만난다. 이달 초에는 틸다 스윈튼이 샤넬 크루즈 콜렉션으로 한국을 와서 만났다. 의지가 되는 사람이다. 멀리 있지만 서로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번에 칸영화제에 간다고 했더니 무슨 영화냐고 물어보면서, ‘설국열차’ 때 말해준 ‘우아한 거짓말’ 줄거리를 읊더라. 그걸 기억하고 있어 놀라웠다.”
-‘오피스’의 배우들과는 어땠나.
“배우의 힘이 큰 영화였다. 서로 호흡을 배려해줬다. 연기 외적으로, 인간적으로 상당히 친해졌다. 지금도 자주 만난다. 특히 류현경 언니와 많이 친해졌다. 지난해 가장 큰 행운은 류현경 언니를 만난 일이었다. 마음이 잘 통한다. 사적으로 자주 연락한다. 요즘엔 서로의 드라마를 모니터링 해주고 있다.”
-블록버스터부터 다양성영화까지 다양한 필모그래피를 자랑한다.
“‘괴물’이 첫 영화였다. 당시 촬영장 분위기나 환경이 당연한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 이후 ‘여행자’를 하면서 작가주의 영화를 처음 만났는데, 그 매력에 푹 빠졌다. 그때부터 큰 영화, 작은 영화에 대한 구분이 없어졌다. 큰 예산이 들어가 성공한 작품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작품도 있다. 흥행에 대한 마음가짐은 시간이 지나면서 숙달되는 것 같지만, 완성도는 그렇지 않다. 내가 나온 작품을 보는 일이 점점 어려워진다. 예전에는 내 작품을 보면서 객관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었다. 연기적인 문제는 아니고 작품 전체적인 문제인 것 같다. 그런 부분에서 ‘풍문’의 안판석 감독님에게 많이 배우고 있다. 안판석 감독님은 모니터링을 할 때 관객의 눈으로 본다.”
-‘오피스’ 또한 그랬나.
“물론. 공식상영 때 완성된 작품을 처음 봤는데, 영 모르겠더라. 참 혼란스러웠다. 새로운 시도를 하고 싶어서 ‘풍문’을 시작했고, 그 와중에 지난해 촬영한 ‘오피스’를 보니까 놀라웠다. 드라마와 영화의 호흡이 다르니까 당혹스러운 점이 있다. ‘설국열차’ 때부터 내 작품에 대해 내 의견이 분명히 생기기 않은 부분이 있다. 시간이 지나고, 평들이 쌓이면서 내 생각이 만들어진다.”
-아직 개봉 전이지만 홍상수 감독과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알려진 정보가 없는데 미리 이야기 해준다면.
“배우들 모두 말하지 않기로 서로 약속했다. (웃음)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때 김의성 선배와 인연으로 홍상수 감독님을 뵀다. 그 자리에서 출연을 제안해주셨다. 홍상수 감독님이라고 하면, 마음 가는대로 만드는 즉흥적인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다. 말을 하지 않으실 뿐, 마음 속에 다 있다. 철저하다고 생각했다.”
-극중 이미례는 사회초년생으로 고충을 겪는다. 승승장구 중인데 미례와 같은 경험을 한 적 있나.
“당연하다. 13세에 ‘괴물’로 정식 데뷔했는데, (광고모델로 활동을 시작한)4세 때부터 오디션을 계속 봤다. 매번 떨어지다가 13세 때 겨우 붙어서 연기를 시작하게 됐다. 그전에는 항상 떨어졌다. 청소년기에 그런 낙담을 겪었다면 지금 배우를 못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때는 어렸기 때문에 배우를 꼭 해야겠다는 열정도 없던 시기였다. 일찍 겪어서 다행이다. 다만 캐스팅 이후가 더 힘들다. 오디션을 보러 다니지 않아도 시나리오가 들어오는 시기가 되면 문제가 없을 줄 알았는데, 그걸 능가하는 고민들이 생긴다.”
-고민을 즐기는 스타일로 보인다.
“그렇긴 하지만, 어쨌든 고민은 괴롭다.”
jay@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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