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이혜린의 무비라떼] 남자든 여자든 학교 졸업 후 취업을 알아보는 건 놀라운 코스가 아니다. 많이 배운 만큼 사회에서 능력을 펼쳐보이려 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그래서 '직장 여성'이라는 카테고리가 따로 있는 것도 이상할 만큼 여성들의 직장 생활은 당연한 게 됐다.
그런데 어쩌면 그건 여성들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사회는 느리게 변하고, 좀처럼 변하지 않는 조직 안에서 여성들은 그제서야 '내가 여자구나'하고 깨닫는 순간에 맞닥뜨린다. 그러다보면 행여 튈까봐 사회 변화속도에 맞춰서 몸을 숙이는 게 편해진다.
영화 '스파이'의 주인공 수잔(멜리사 맥커시 분)도 그런 여성이었다. CIA에 최고 성적으로 입사해놓고도 잘생긴 선배 파인(주드로 분)의 뒤치닥거리를 하는데 열중해온 그는 엉겁결에 현장 근무를 지원해놓고도 진짜 현장 투입이 결정되자 "정말 내가 가냐"고 놀라는 인물이다.
반전은 그 다음부터. 소심하고, 입만 산 여성일 거라는 편견을 날리고 그는 의외로 몸싸움도 잘했고, 순발력도 좋았으며, 사람도 죽일 줄 알았다. 입사 당시 자신의 날쌘 훈련 모습을 보고도 깜짝 놀랄만큼 오랜기간 '비서'에 익숙해졌던 그가 본연의 실력을 되찾는 순간들이다.
능력 있는 여성과 좀처럼 변하지 않는 조직의 충돌은 적잖이 쓰여온 꽤 훌륭한 코미디 소재지만, 이를 이토록 유쾌하고 신선하게 비틀어낸 영화는 (감히 단언컨대) '스파이'가 으뜸이다.
수잔이 상대할 악역, 호흡을 맞추는 동료, 미션을 받는 상사는 모두 여성이다. 악역은 성격은 나쁘지만 의외로 귀엽고, 동료는 푼수 같지만 제 할일을 해낸다. 상사는 자기만 아는 나쁜 여자 같지만 수잔을 믿어준다. 생각해보면 첩보물에서 이렇게 다양한 성격의 여자들이 나온 것도 거의 처음.
수잔을 돕거나, 방해하거나, 괴롭히는 인물들로 등장하는 남자 캐릭터는 과장된 듯 하지만 직장 여성들이라면 굉장히 익숙한 인물들이다. 여성들이 사회에서 꼭 보게 되는 진상들을 유형별로 잘 정리해놓은 느낌이다.
파인은 잘생긴 외모를 무기로 여성을 이용하는 남자. 얼핏 보면 능력있고, 여성을 위하는 매력적인 선배지만 여성을 동등한 동료로 인식하지 않는 인물이다. 자신의 위치 바로 밑까지만 허용하는 그는 조직 내에서 유리천장을 공고히 만드는데 일조하는 남성이다.
영화 속 폭소의 대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포드(제이슨 스타뎀 분) 역시, 직장 여성들이라면 한번씩 상대해봤을 캐릭터다.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는 인물로 "이 중요한 일을 여자에게 맡길 수 없다"고 대놓고 주장하는 인물. 두 다리를 다치면 두 팔로 걸어서 미션을 완수했다고 진지하게 말하는 그의 말은 90% 이상 믿을 수가 없고, 수잔 덕분에 살았으면서 자기가 수잔을 살렸다고 믿는 구석이 귀엽기까지 한 인물이다.
밤낮 없이 섹스 생각 뿐인 알도도 있다. 상대를 가리지 않고 쏟아내는 작업 멘트에, 절대 기회를 놓치지 않는 성희롱, 성추행은 시도 때도 없이 공격해들어온다.
이들의 눈에 수잔은 뒤늦게 '설치는' 내근직 여성일 수 있겠지만, 수잔의 눈에도 이들이 한심하긴 마찬가지다.
영화는 과체중의 수잔을 놀리지 않고, 그런 수잔의 눈에 비친 남자들의 행태를 들여다본다. 가장 대표적인 장면이 공항 앞에서 스포츠카에 탄 남자들을 마주친 상황이다. 이전 영화라면 남성의 시선에서, 예쁜 여자 사이에 끼어있는 수잔을 보고 짜증을 내는 식의 연출이었을 거다. 그러나 '스파이'는 달랐다. 예쁜 여자 앞에서 호들갑을 떨다가 수잔 앞에서 정색을 하고는, 또 예쁜 여자 앞에서 호들갑떠는 남자들의 우스꽝스런 모습에 방점이 찍힌다.
물론 여성, 직장 여성의 문제를 다룬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이 영화 자체로도 재밌다. 여성 문제는 너무 해묵은 이슈가 아닌가 싶어서 여성 영화로 치부하기도 좀 그렇다.
하지만 따지고보면 여성들에게 꼭 필요한 영화이기도 했다. '해묵은' 이슈를 이렇게 재밌고 신선하게 풀어낼 전례가 필요했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겠지만 한국에선 딱히 해묵은 이슈가 아니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아닌 척, 모른 척 하고 있지만 사실 한국 여자는 똑같이 일을 해도 돈을 적게 벌고(OECD 국가 중 남녀 임금 격차가 가장 큰 나라 중 하나다), 능력이 좋으면 좋을 수록 기만 세다는 역차별에 시달린다.
분명 묵직한 스트레스인데, 아무도 큰 관심을 갖지 않던(어쩌면 스스로조차도) 이 스트레스가, 의외로 멀리서 날아온 코미디 영화가 어루만져주는 기분. 꽤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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