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 부러지고 야무진 채시라인데. 말투나 행동이 한 박자씩 늦어졌단다. 요리조리 뜯어봐도 화려한 외모, 시원한 미소, 늘씬한 몸매까지 지금껏 우리가 알아온 그 배우 채시라는 변함이 없었지만, 아주 조금 현숙이의 느낌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예를 들어 “이제는 외울 게 없어 좋다”고 웃는 순진한 미소가 그랬다.
채시라는 종영한 KBS 2TV 수목드라마 ‘착하지 않은 여자들’에서 주인공 현숙 역을 맡아 열연했다. 애초 ‘착하지 않은 여자들’의 수목극 편성은 모험이라면 모험이라고 할만 했다. 배우들의 연령으로 보나, 내용으로보다 주말 가족드라마에 더 어울릴만한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 이 드라마는 동시간대 1위 자리를 줄곧 지키며 저력을 보여줬다. 대 배우들의 힘이며, 이들을 아울렀던 김인영 작가 필력의 승리였다.
호평들 덕분일까? “시청률은 만족을 못 하겠다”고 토로하는 채시라의 표정에는 만족감과 즐거움이 가득 서려있었다.
“15%는 예상했는데…. 그 예상에 못 미친 게 아쉽지만, 그래도 내용이라던가, 많은 의미를 남겼다 생각해요. 한자리수로 안 내려간 것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몰라요.(웃음) 사람은 만족이 없는데 이러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 거죠. KBS에 효자 노릇을 했다고 생각했다고 생각하니까 만족스러워요. 날씨도 좋고 그 시간대 많이 놀러 다니실 수도 있는데 시청률 1위를 한 건 많이 봐주시고 응원해주셨기 때문이에요. 정말 감사합니다.”
현숙은 최근 채시라가 맡아왔던 화려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배역들과는 거리가 좀 있는 캐릭터인 게 사실이다. 고등학교 시절, 담임에게 밉보여 퇴학을 당하고, 과외선생과 연애 이후 임신으로 결혼한 후 하나밖에 없는 딸을 박사로 만들기 위해 달려온 아줌마 현숙은 ‘열등감 덩어리’라 표현해도 좋을 정도로 과거의 상처에 집착하는 인물이었다. 자존감도 낮고, 이리저리 사고를 치는 사고뭉치 캐릭터였다. 그럼에도 채시라는 “‘망가짐’에 대한 부담은 전혀 없었다”고 했다.
“원래 그런 걸 좋아해요. 카리스마 강한 여성상이 매력 있는데 ‘여명의 눈동자’에서도 화장기 거의 없이 정글에서 진흙탕에 문대고, 벌레들과 함께 뒹굴면서 20대 초반 엄청난 촬영을 했었죠. 그래서인지 화장기 없는 여배우의 얼굴에 검댕이 묻었을 때, 클로즈업을 하면 풀 메이크업을 뛰어넘는 아름다움이 있다고 생각해요. 메이크업이 만들어주는 아름다움 뛰어넘는 게 그 역할에 충실했을 때 나오는 모습인 것 같아요.”
사실 작가가 애초에 쓴 현숙의 캐릭터는 메이크업과 패션에 관심이 많은 여자였다. 그러나 채시라는 감독과 의논을 하며 곱슬머리에 수수한 옷차림을 한, ‘아줌마틱’한 모습이 가득한 지금의 현숙 캐릭터를 만들었다. 그게 더 와 닿았기 때문이다.
“사실 무직에 중학교밖에 못 나오고 돈도 없는 여자인데 꾸밀 일이 뭐가 있겠어요. 메이크업을 안 하는 쪽으로 머리도 곱실거리게 했더니 시놉시스를 봤을 때 내가 하고 싶은 역할이라는 게 와 닿았어요. 그런 부분은 더 망가지게. 그랬을 때 나중에 나오는 모습이 나말년 선생을 만났을 때 대조가 될 거라 생각했죠. 장미희 선생님과도 대조가 됐는데 나중에 선생님이 ‘그런 모습이 보기 좋았다’고, ‘늘 예쁘게 나오는 모습보다 배우다운 모습’이라고 칭찬을 많이 해주셨어요.”
‘착하지 않은 여자들’은 2012년 ‘다섯손가락’ 이후 약 3년 만에 결정한 차기작이었다. 그 동안 작품을 하지 않았던 이유가 있는 걸까? 채시라는 “기다렸다”고 말했다. 많은 30, 40대 여배우가 그러하듯, 해보고 싶은 역할을 찾는 것이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마음에 드는 게 있을 때까지 기다린 거예요. 지금까지는 카리스마가 있거나 화려하거나 그런 여성상이었는데, 저는 전작하고 반대되는 역할을 하는 성향이었거든요. 그게 시청자들에게 신선하게 다가가니까요. (제안이 온 건) 영화도, 드라마도 있었는데, 마음이 안 움직이니까 못했어요. 내 게 아니네. 그렇게 하다가. ‘착하지 않은 여자들’을 보니 이건 내 거다. 마음이 움직였어요. 흥분되고요. 내가 하면 그림이 어떻게 그려질까? 그런 느낌이 드니까 의욕이 생겨 결심하게 됐죠.”
김혜자와의 연기는 그가 ‘착하지 않은 여자들’을 택하게 된 또 다른 이유였다.
“김혜자 선생님하고 모녀 호흡을 맞춰보고 싶었어요. 배우라면 누구나 그런 생각을 갖고 있을 거 같아요. 저 역시 그랬고요. (생략) 김혜자 선생님이 엄마니까 제일 많이 부딪혔죠. 그 짧은 대사들도 엄마가 다 맞춰주셨고, 아예 먼저 보여주시기도 하시고. 그러면 저는 저렇게도 하시는구나, 배우고. 또 저는 이렇게 준비를 해왔다고 얘기도 하고요. 의견을 주신 거에 대해 귀담아 들었어요.”
열린 결말로 끝난 드라마였기에 벌써부터 배우들 사이에는 시즌2에 대한 이야기들이 오가기도 했다. 농담처럼 한 말이었지만, 가능성이 없는 일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채시라는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시즌2가 나오면 해야죠. 마리와 두 남자는 어떻게 될지, 장모란 여사와 엄마 아빠는 또 어떻게 살아갈지.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이 너무나 무궁무진하죠. 현숙이는 나말년과 사돈이 돼서 벌어지는 일들에 맞닥뜨릴 수도 잇고요. ‘전원일기’처럼 됐으면 좋겠어요. 쫑파티 때도 열린 결말을 얘기했을 때 그런 거에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어서 반갑더라고요. 이 드라마가 주말드라마로 갔으면 더 좋았을 거다, 아쉽다는 얘기도 많이 들었어요. 그런 여론도 봤을 때 그렇고 시즌2를 하면 더 많이 좋아하시고 그렇지 않을까요?”
한 가지 확실히 알 수 있었던 것은 ‘착하지 않은 여자들’을 하며 채시라가 많이 행복했었다는 점이였다. 드라마를 찍기 전에도, 찍으면서도, 찍은 후에도 또 다음 편을 기다리게 하는, 배우들이 행복했던 드라마가 세상에 또 얼마나 있을까.
“‘착하지 않은 여자들’ 배우들이 함께 하는 여행 계획을 세워보려고 해요. 쉽지는 않아요. 10명 정도 모아서 생각했다가 무산이 되기도 했고요. 스케줄도 있고 각자 가정도 있다 보니 잘 안되네요. 소규모로 생각해볼만 해요. 그게 아니라도 가끔씩 만나 밥 먹으며 얘기할 수 있는, 그런 것도 쉽지는 않은데 그것만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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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섭 기자 greenfield@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