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류사회’가 또 재벌 이야기를 하냐고 미심쩍어하는 성미 급한 시청자들을 살짝 민망하게 만들었다. 재벌가를 배경으로 청춘들의 사랑과 야망을 다루는 ‘상류사회’가 2013년 방영돼 현실적인 이야기로 사랑받은 ‘따뜻한 말 한 마디’ 하명희 작가와 최영훈 PD의 힘을 느끼게 했다. 진부할 수 있는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우면서도 인물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과 재밌으면서도 공감대를 형성하는 차진 대사로 첫 방송부터 흥미를 자극했다.
지난 8일 첫 방송된 SBS 새 월화드라마 ‘상류사회’는 기가 센 사주를 갖고 태어났다는 이유로 모친 민혜수(고두심 분)에게 구박받으며 자라서 진짜 사랑을 찾고자 하는 재벌딸 장윤하(유이 분)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대기업의 유능한 사원으로 성장한 ‘개천의 용’ 최준기(성준 분)의 숨길 수 없는 야망이 그려졌다. 여기에 재벌의 지위를 마음껏 누리는 속물 유창수(박형식 분)와 윤하가 재벌가 일원이라는 것을 모르고 친구가 된 순수한 이지이(임지연 분)의 엇갈리는 사랑과 갈등이 예고됐다.
이 드라마는 명시돼 있지 않으나 명확히 존재하는 다른 계급 사회를 사는 남녀의 사랑을 다루는 멜로 드라마. 첫 방송은 화려한 재벌가의 일원이거나 그 주변을 맴돌거나 재벌가의 구성원으로 진입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관계와 내면의 속성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사실 재벌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는 매년 셀 수 없이 쏟아지는 드라마의 단골 소재.
허나 ‘따뜻한 말 한 마디’에서 불륜 이야기로 현실적인 공감을 일으켰던 하명희 작가는 이번 ‘상류사회’에서도 식상할 수 있는 이야기도 맛깔스러우면서도 사실적인 대사로 재미를 만들어냈다. 하명희 작가는 ‘사랑과 전쟁’을 10여년간 집필하며 입맛 까다로운 주부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던 내공 강한 작가. ‘따뜻한 말 한 마디’와 ‘우리 결혼할 수 있을까’에서 새롭진 않아도 사람의 내면을 섬세하게 파헤치며 강렬한 울림을 선사했던 하명희 작가는 이번 ‘상류사회’에서도 성공과 사랑에 대한 결핍이 있는 4명의 남녀 이야기를 깊이 있게 다뤘다.
기가 센 사주이기 때문에 오빠 장경준(이상우 분)을 잡아먹을 수 있다는 예언을 믿는 어머니의 미움을 받고 자란 윤하,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성공의 사다리를 타고자 하는 욕구가 강한 준기, 아버지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강해 설령 친구일지언정 사람을 이용할 줄 아는 창수, 때묻지 않은 순수함으로 숨막힌 인생을 사는 윤하의 유일한 숨구멍인 동시에 이로 인해 사랑의 아픔을 겪게 될 지이의 이야기가 설득력 있게 담겼다. 주인공 뿐만 아니라 주인공들의 가족들의 이야기도 상당히 인상적이다.
무시를 받으면서도 부유한 삶을 버릴 수 없어 자존심을 굽히는 혜수, 뻔뻔하기 그지 없는 악독한 재벌 회장 장원식(윤주상 분)과 분노를 유발하는 그의 첩 김서라(방은희 분)의 서로가 서로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는 갈등이 꽤나 차지게 다뤄졌다. 세상 아래 새로운 이야기는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 같은 소재, 심지어 안방극장에 줄기차게 사용된다 하더라도 이를 어떻게 양념하느냐에 따라 드라마의 재미가 달라진다. 하명희 작가와 ‘따뜻한 말 한 마디’ 성공을 이끈 최영훈 PD는 이야기가 말끔하게 끊어지는 게 아니라 뒤를 길게 빼는 듯한 여운이 남기는 연출로 인물들의 행동에 깊은 의미를 부여하게 만든다. 딱딱 끊어지는 명료한 연출이 아니라 뭔가 복선이 있는 듯한 한 박자 느린 편집선은 이번에도 드라마가 안기는 흥미를 좀 더 길게 느끼게 만들고 있다.
주인공을 맡은 성장 가능성 높은 젊은 배우들의 연기도 기대 이상이었다. ‘선덕여왕’ 특별 출연을 시작으로 ‘미남이시네요’, ‘오작교 형제들’, ‘버디버디’, ‘전우치’, ‘황금무지개’, ‘호구의 사랑’을 통해 작품의 비중과 연기의 폭을 넓혀온 유이는 이번 드라마를 통해 지상파 평일 드라마 첫 주연을 꿰찼다. 하루 아침에 이 자리에 오른 게 아니라 데뷔 후 차근차근 연기력을 쌓아온 그는 황금수저를 과감히 버리려고 하나 뜻대로 되지 않아 상처를 입는 윤하를 자연스럽게 표현했다. 그동안 주로 밝은 역할을 했던 유이는 ‘상류사회’에서 아픔을 가지고 있는 인물을 비교적 무리 없이 연기를 했다.
데뷔 초 연기력 논란이 있었으나 ‘하이드 지킬, 나’에서 완벽한 악역 연기로 전환점을 맞은 성준은 힘을 뺀 연기를 보여줬다. ‘나인’, ‘상속자들’, ‘가족끼리 왜이래’를 거치면서 연기력을 인정받은 박형식 역시 그동안 했던 밝은 캐릭터에서 벗어나 어두운 분위기로 시청자들을 놀라게 했다. 스크린의 샛별로 불리는 임지연은 통통 튀는 발랄한 연기를 잘 소화했다. 무엇보다도 이 드라마는 고두심, 윤주상, 양희경, 방은희 등 믿고 보는 중견 배우들의 농익은 연기를 보는 맛이 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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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제공, '상류사회' 방송화면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