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비수사’ 곽경택의 뚝심과 진가 돋보인 무결점 휴먼 드라마
OSEN 손남원 기자
발행 2015.06.09 15: 12

[OSEN=김범석의 사이드미러] 노래방에서 소개팅녀의 환심을 사겠다고 정엽의 ‘낫싱 베러’를 선택하는 남자에 대한 시선은 크게 두 가지다. 용감하거나 안쓰럽거나. 과한 것은 역시 부족한 것만 못 한 법이란 사실을 ‘극비수사’를 보는 내내 다시 한 번 깨달았다. 터질 것처럼 채우기 보단 취사선택해 잘 버릴 줄 아는 것이 몇 배 더 현명하단 사실을 상기시켜준 108분이었다.
오락 영화로서의 미덕을 잃지 않으며 감동을 자아내고, 또 여기에 세상을 향해 묵직한 메시지까지 탑재한다는 건 여간한 내공이 아니고선 불가능한 영역인데 곽경택 감독은 흠잡을 데 없는 능수능란함을 발휘했다. 마치 ‘제가 노래를 잘 하진 못하지만 애창곡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한번 들려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은 겸손과 편안함, 익숙하면서도 불쑥불쑥 긴장하게 만드는 명장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과시했다.
 ‘극비수사’가 관객과의 기 싸움에서 일찌감치 승기를 잡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든 건 중반부 유괴범 잡는 도사 중산(유해진)이 형사 길용(김윤석) 앞에서 흙바닥에 한자어 ‘소신’을 쓰며 자신의 집념을 처음 드러낼 때였다. 유해진에겐 이 한 장면을 향해 달려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뭉클한 감동이 전해졌고, 소신은 극비수사를 대신할 표제어로도 전혀 손색없는 단어라는 점에서 전율이 돋았다.

롤러코스터를 탄 것 같은 쾌감까진 아니지만, 이 영화가 충분히 흥미로울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탄탄한 시나리오 덕분이다. 동명의 원작 소설을 토대로 했지만 이를 그럴 듯한 영상 언어로 변모시킨 한대덕 작가가 궁금해졌을 만큼 치밀한 구성과 드라마를 밀고 나가는 힘과 축이 남달랐다.
 반전에 대한 강박이 없어서 한결 더 좋았는데 이런 게 가능했던 이유 역시 이야기를 최대한 단순화하면서 인과관계의 빈틈을 철두철미하게 개연성이라는 시멘트로 잘 반죽해 메꿨기 때문이다. 서사는 단순하지만 오히려 이야기에 파워가 실리고 집중하게 되는 힘이 바로 오래 다듬은 텍스트 덕분이란 생각이다.
영화는 이를 위해 다양한 대립구도를 효과적으로 활용한다. 극비 수사와 공개 수사의 대립부터 유괴범을 잡으려는 경찰 조직과 피해 아이부터 구해야 한다며 동분서주하는 기동대 출신 부성애 강한 형사, 서울과 부산 형사들의 무늬만 공조인 낯부끄러운 치적 가로채기, 또 증거 위주의 과학 수사와 점괘와 기도를 통한 샤머니즘의 부딪침 등이 곽경택의 뚝배기 같은 연출과 시너지 효과를 내며 불쏘시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감독의 의도인지 불분명하지만 부산 특수본부로 쓰인 왕자극장 지하에 쌓여있는 대형 영화 간판도 세태 풍자의 도구로 읽혔다. 가령 영구와 땡칠이의 주인공인 심형래의 꺼벙한 얼굴과 장난기 머금은 표정은 우왕좌왕하며 돈과 진급에 사로잡혀 사는 인간 군상을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고, 공포영화 오멘 속 여주인공의 격앙된 표정도 거꾸로 돌아가는 미친 세상에 대한 경고처럼 와 닿았다.
연기력과 별개로 ‘남쪽으로 튀어’ ‘해무’ ‘쎄시봉’의 삼단 콤보 흥행 실패를 맛본 김윤석은 모처럼 동향 감독을 만나 흥행 배우로서의 자존심을 회복할 것 같다. 워낙 ‘추격자’의 잔상이 강해 뛰어넘을 수 있을 진 모르지만 적어도 ‘완득이’ 때처럼 몸이 가벼워진 김윤석을 발견할 수 있었다. 3류 투수는 타자와 승부하지만 1류 투수는 자신의 볼카운트와 승부한다는 말처럼 김윤석이 더 이상 송강호를 의식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호연이었다.
'삼시세끼'에서 차승원을 받쳐주는 것 같지만 실제론 자신의 가치를 높일 줄 아는 영리한 배우 유해진도 ‘극비수사’를 풍성하게 해준 주역이다. 법대 출신으로 정치 쪽에 발을 담갔다가 이도저도 안 돼 도사가 된 중산의 가시밭길 과거를 불과 몇 가지 표정과 제스처만으로 보여줄 수 있는 배우는 생각보다 흔치 않다. 세 자녀를 키우는 가장으로서의 고민과 중압감, 세상을 등진 도사의 관조를 오가는 연기도 유해진이기에 가능했다. 자신의 공을 가로챈 스승을 원망하지 않으며 오히려 담담하게 미소 짓는 모습에선 알 수 없는 죄책감과 먹먹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극비수사’는 ‘친구2’에 이어 한때 대작 콤플렉스에 빠져 채권 채무로 골치를 썩은 감독이 “이제 영화사 운영은 다신 안 한다. 법적으로도 못 할 것”이라고 선언한 뒤 절박한 마음에서 만든 휴먼 드라마다. 그런 만큼 절실함과 진솔함이 가득 배어있다. 범죄 수사물의 외피를 빌렸지만 인간이 인간답지 못 할 때 어떤 재앙이 덮치는지,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물려줘야 할 인간 본연의 것이 과연 무엇인지 말하는 영화다. 15세 관람가로 18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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