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유해진은 천천히 말했다. 느린 말투라기 보다는 신중을 기하기 위해서 였다. 칭찬에는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최근 부쩍 높아진 관심에 대해 “내 입으로 그렇다고 할 순 없잖아요”고 은근슬쩍 너스레를 떨었다. 어느새 그의 담백한 입담에 빠져들었다.
유해진은 올 상반기 재발견된 배우 중 하나다. 지난해 866만 관객을 모은 영화 ‘해적:바다로 간 산적’으로 심상치 않은 인기를 얻더니, 올해 초 케이블채널 tvN 예능프로그램 ‘삼시세끼-어촌 편’로 자연인 유해진의 소탈함을 보여줬다. 그의 지인들만 알고 있던 매력을 온 시청자들이 알게 되면서 카드회사 CF까지 꿰찼다.
본업에도 충실했다. 주연작들이 줄줄이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18일에는 영화 ‘극비수사’가, 25일에는 영화 ‘소수의견’이 개봉한다. ‘극비수사’에선 도사 역을, ‘소수의견’에선 이혼 전문 변호사 역을 맡는다. 전혀 다른 직업군이지만, 믿는 바를 향해 달려가는 소신 있는 인물이란 점은 공통점이다.
꾸준히 한 길을 걷는다는 점은 유해진도 마찬가지였다. 1997년 영화 ‘블랙잭’ 이후 수많은 작품과 캐릭터를 거쳤다. ‘해적’(2014) ‘전우치’(2009)처럼 웃음을 주는 코믹한 인물부터 ‘부당거래’(2010) ‘이끼’(2010)처럼 강렬한 악역까지 그 폭이 상당히 넓다. 최근 높아진 관심은, 한 길만 파온 보상이기도 했다.
“열심히 하면 돈이 쫓아온다고 하잖아요. 상 받으려고 연기하는 배우가 없는 것처럼, 배우도 똑같은 것 같아요. 물론 열심히 해도 잘 풀리지 않는 사람도 있어요. 피터지게 노력하는 사람은 굉장히 많으니까요. 그래서 항상 말하는 게 운이에요. 생각에도 없던 ‘삼시세끼’가 걸렸잖아요.(웃음) 운에만 기대는 건 아니지만, 운이라는 건 불공평한 것 같아요.”
그는 그것이 인생사라고 말했다. ‘극비도사’에서 도사 역을 맡은 터라, 더 그럴싸하게 들렸다. 그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노력 다음부터는 하나의 흐름”이라며 좋은 기회들이 찾아온 자신은 ‘행운아’라고 자칭했다.
“후배들과 술자리에서 늘 하는 말이 있어요. ‘언젠가 온다. 다만 그때까지 너무 힘 빠져 있으면 안 된다’고요.”
최근에는 다시 ‘삼시세끼’를 찾았다. “아직 방송 전”이란 전제를 단 그는 “지난번 만재도는 고립됐다는 답답함이 있었는데, 이번 촬영지인 강원도 정선은 자연을 느낄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며칠 더 있고 싶었다”고 짤막하게 말했다. 이어 “산은 은근한 스승이자 친구”라는 ‘산 예찬론’이 이어졌다.
어느덧 40대 중반에 접어들었다. ‘극비수사’에서 세 딸의 아빠로 나오는 그는 “그만한 나이의 딸이 있으면 좋겠다는 나이”라고 말했다. 결혼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그럴 때가 한참 지났다”며 “이제 외로움을 넘어선 고독이 정확한 표현”이라고 재치 있는 답변을 내놨다.
대신 그는 40대를 다른 의미에서 중요한 기점으로 삼았다. “세월이 너무 빨리 간다”며 “먼 훗날 돌아봤을 때 덜 후회하지 않았으면 한다. 막 흘러가는 건 방지하고 싶다”고 말했다. 진지한 성찰과 고민들이 느껴졌다.
“잘 늙어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잘 살아야겠다와 비슷한 맥락이죠. 어떻게 하는 게 잘 늙는 건지라는 걸 고민하고 있어요. 그릇이 작은 사람처럼 예민하게 반응할 때, 스스로 생각을 많이 해요. 그럴 때 산에 가요. 큰 그릇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사는 것 보다는 나은 것 같아요.”
그의 깊이 있는 답을 듣고 있노라면 무슨 주제로도 밤새도록 수다를 떨 수 있을 것 같았다. 진정성 있는 지적인 면모, 그것이 바로 ‘참바다씨’ 유해진의 매력이었다.
jay@osen.co.kr
민경훈 기자 rumi@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