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정' 정명공주는 기존의 사극에서 봐오던 나약한 공주가 아니다.
정명공주는 왕에 대한 존경과 복종이 강하게 뿌리 내린 조선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원칙주의자'다. 존재를 숨기기 위해 남자 화이로 살아온 투쟁에서 보듯, 자신이 지켜야하고 옳다고 생각하면 주위에서 아무리 말려도 엄동설한에 맨발로 투쟁하며 의지를 관철할 사람이다.
물론 그가 남장을 한 채 살았다는 것은 픽션이 가미된 것이다. 실제로 83세까지 장수한 정명공주가 격랑이 휘몰아친 6대 왕조를 겪어낸 만큼 남자로 살았을 것이라는 상상력을 붙여 정명의 험난한 삶을 표현했다.
정명을 연기하는 배우 이연희의 여리여리한 몸매와 청순한 외모만 보면 나약한 공주로 보일 수도 있다. 겉으로만 봤을 때 그의 이미지가 공주에 부합한다. 제작진도 그런 그의 이미지를 충분히 활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연희는 자신을 가둬온 틀을 깨고 있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담담한 말투, 의지 섞인 눈빛과 결연한 표정으로 정명을 그려내고 있다.
지난 22일 방송된 MBC 월화드라마 '화정'(극본 김이영, 연출 김상호 최정규) 21회는 정명공주가 어머니 인목대비(신은정 분)의 뜻을 거절하고 오라비 광해(차승원 분)의 곁에 남아 유황장인으로 살기로 결심하는 모습이 담겼다.
정명은 영창대군(전진서 분)을 내친 광해를 미워하면서도 마음 한 켠에는 그를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결국 정명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자신을 궁궐에서 탈출시키려는 강인우(한주완 분) 앞에 나타나 떠나지 않겠다고 했다. 정명은 광해에게 "전하를 용서한 것은 아니다. 아마도 그런 날은 끝내 오지 않을 것"이라며 "그렇다해도 화기도감에 남고 싶다. 이것이 제 선택이다. 지금 이 나라에 필요한 군왕 곁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라고 생각이 바뀐 이유를 전했다.
이날 김개시(김여진 분), 강주선(조성하 분), 이이첨(정웅인 분)과 화기도감 장인들은 화이가 정명공주라는 사실에 충격 받았다. 특히 주선은 정명이 자신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 화이로 살았다고 직감했다. 향후 세 사람이 정명을 경계하며 광해의 안위를 위협하는 과정이 중요한 관전 포인트가 될 전망이다.
정명이 다른 공주들과 다른 점은 이성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두드러진다. 현재 그는 홍주원(서강준 분), 강인우(한주완 분), 자경(공명 분)까지 세 남자의 마음을 휘어잡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진척된 관계가 주원인데 이마저도 사랑이라기보다 절친한 친구를 걱정하는 마음에 가깝다. '남자 없이 잘 사는' 독립적인 여성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정명을 연기하는 이연희가 도화지처럼 깨끗한 얼굴에 씩씩하고 용기 있는 공주를 그렸다. 그동안 이연희가 외모라는 벽에 갇혀 연기력을 인정 받지 못했던 건 사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을 깨기 위해 애쓰며 꿋꿋이 버텨온 그다. 이연희의 내공이 '화정'을 통해 드러나고 있는 셈이다. 이연희가 앞으로 만들어나갈 정명공주가 더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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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정' 방송화면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