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계속 참아야하느냐. 오늘 이 땅에선 불의가 승리하고있는데 공주가 여자라고 물러서면 안 된다."
배우 이연희가 '화정'에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용기 있고 강단 있는 공주상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곱디 고운 한복을 입고 방 안에 앉아만 있는 고결한 세손이 아니라 왕과 나라를 위해서라면 제 한 목숨 아끼지 않은 용감한 여장부다.
이연희는 MBC 월화드라마 '화정'(극본 김이영, 연출 김상호 최정규)에서 하늘의 신탁을 받은 적통, 정명공주를 연기하며 물오른 연기력을 드러내고 있다. 그동안 그의 미모가 강조된 연기가 돋보였다면 이번 드라마에서는 좀 더 내면 연기에 치중한 모양새다.
목소리에도 단단한 힘을 실었고, 극한 상황에 처한 정명의 내면을 보여주기 위해 매번 다른 얼굴로 나타난다. 그동안 여성스럽고 가녀린 대표적 청순미인의 이연희는 찾아보기 힘들다. 한 나라의 공주라는 높은 신분으로 남정네의 옷을 입고 명과 후금의 전쟁에 참가하는가 하면, 왕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폭탄 제거도 서슴지 않는다.
지난 13일 방송된 27회에서 정명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은 백성들의 돌팔매에 맞아가면서까지도 광해(차승원 분)와 사랑하는 남자 홍주원(서강준 분)을 지키기 위해 전면에 나섰다. 왕권의 안정을 위해서라면 왕과 적대관계에 놓인 강주선(조성하 분)의 장자 강인우(한주완 분)와도 청혼을 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이날 명이 쇠퇴하면서 후금으로 힘이 쏠리고 있었다. 광해는 포로로 잡혀간 백성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화친할 것을 주장했다. 자존심에도 그들을 '황제'라 부르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후금에 답서를 보내 홍주원을 비롯한 조선의 군사들을 되찾아오겠다는 것. 그러나 대신들은 오랑캐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것과 같다면서 결사 반대했다. 그러나 광해는 홍교리의 목숨, 백성의 목숨 하나하나를 조선과 같다고 평가하면서 왕의 결단을 굳혔다.
강주선은 아들 인우와 명의 시대가 가고, 후금이 지배할 시대에 맞춰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광해의 편에 따를 것을 결정했다. 백성들은 실망감을 드러내며 들고 일어섰다. 한마음으로 화기도감으로 몰려가 "주상의 폭정과 패악의 온상이다. 오랑캐들에게 나라를 내주자는 이것들을 몰아내자"면서 폭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는 모두 능양군(김재원 분)의 계략이었다. 그가 만든 조직 일심회를 내세워 백성들의 마음을 뒤흔든 것이다. 정명은 도감을 지키려다 그들의 주먹에 맞아 피를 쏟았다. 그러면서도 "조선의 미래는 명이 지켜주지 않는다. 그대들이 진정으로 아끼는 소중한 왕을 잃은 후에 그제서야 후회할텐가"라며 눈물로 호소했다. 그러고나서 광해에게 찾아가 청을 올렸다.
역사에 나온 정명은 선조부터 숙종까지 6대의 왕을 거치면서 험난한 삶을 살아왔다. 역사적 사실을 살린 면도 있지만 화기도감의 장인으로 살았다는 픽션을 추가한 정명을 이연희가 연기하고 있다. 우려와 달리 이연희는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소화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대본에 나온 대사에 자신만의 캐릭터 분석력을 더해 새로운 공주상을 만들어냈다고 볼 수 있다.
연기보다 외모가 돋보이는 아킬레스건을 지녔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해 현장에서 대본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보면서 정명을 '이연희화' 하는 중이다. 극이 중반을 넘어서면서 앞으로 그의 역할이 더 중요해졌다. 왕위에 오를 능양과 맞서야 하는 숙제가 남아있다. 지금까지 보여준대로라면 앞으로의 정명공주의 모습에 기대를 가질만 하다. 이연희가 그려낼 공주에 마지막까지 기대가 모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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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정' 방송화면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