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NC 한성호 대표를 포탈 사이트에서 찾으면 연관 검색어가 우수수 쏟아진다. 한성호 주식, 한성호 유재석, 한성호 굿바이데이, 한성호 결혼 등등. FNC가 대한민국 최고의 MC로 손꼽히는 유재석을 영입했던 지난 16일, 한성호 붐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수백 수천개의 관련기사들이 쏟아졌고 주식시장에서 FNC 주가는 지붕을 뚫었다. 이날 FNC 최대주주인 한 대표의 개인 지분 가치는 1000억원을 돌파했다. 그런데 한성호가 도대체 누구야?
20일 오후, 서울 강남구 청담동 111번지 FNC 사옥에서 한 대표를 만났다. 40대 초반의 그는 대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동안의 소유자였다. 긴 인터뷰에 들어가기 전 핵심 질문 하나? 유재석과 정형돈 말고도 톱MC를 계속 영입할거냐고 묻자 그는 단 한 순간 주저없이 대답했다. "물론이죠. 계속 만나고 계속 얘기하는 중이지만 아직 결정된 게 없을 뿐입니다.'
- 히트곡 ‘굿바이데이’로 데뷔한 가수가 정규앨범 2집만 내고 노래를 그만 뒀다. 어리거나 젊은 세대들이 한 대표가 가수 출신이란 걸 잘 모르는 배경이다. 포기가 너무 빨랐다.
진정으로 가수를 하고 싶었지만 제 기대만큼 빛을 못 봤다. 물론 잘하고 싶었고 성공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 처음에는 잘 할 거라 생각했고 자신도 있었다. 그런데 잘 안 되니까 남 탓을 하게 되더라. 같은 회사의 잘 아는 동료들이 아주 잘 되는 걸 보면서 ‘나도 저만큼은 하잖아. 홍보나 마케팅을 제대로 못해서 안 되는 것 아냐’라고. 그 때 깨달았다. 이래선 안 된다고. ‘나 자신부터 돌아보자’ 결심했다.
‘투헤븐’이란 곡이 조성모에게 넘어간 게 당시에는 안타까웠지. ‘투헤븐’을 내가 불렀으면 국민 가수가 됐을 거라는 생각도 했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 노래는 조성모의 노래가 맞다. 내가 불렀으면 그 만큼 성공하지 못하지 않았을까. 결국엔 내가 가수로서 갖고 있는 자질들이 조성모나 또 다른 누구보다 부족하지 않나 반성한 거고 미련없이 다른 길을 걷자고 돌아섰다.
그 때는 음악을 아예 안 하려고 했다. 어려서부터 내가 직접 노래하는 가수만 꿈꿨었으니 그럴 수밖에. 7,8년을 음악에만 빠져살았던 터라 당장 할 게 없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보컬 디렉팅으로 학원에서 음악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의외로 누군가를 가르치는 게 적성에 맞더라고. 대학 때 전공이 중어중문과였다. 학교로 돌아갈 마음을 굳힌 참에 음악에 대한 미련이 조금씩 되살아났다.
그러다 보니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내가 가수가 되기 위해 유명 작곡가 밑에서 열심히 사는 동안 배운 게 참 많더라고. 녹음실에서 항상 밤새고 잠깐씩 집에서 쉴 때도 오선지를 껴안고 살았으니까. 그러다보니 앨범 제작을 진행하고 곡도 쓰고 하는 프로듀싱이 나한테 더 맞지 않을까 했다. 작곡가로 전업한 뒤에 보니까 가수했던 경험이 너무 크게 도움이 됐다. 이 노래를 만들면 가수들이 소화 할 때 어떻겠구나 알겠더라고. 젊은 시절의 쓰고 달고 슬프고 기뻤던 그 모든 경험들이 다 지금의 토대가 되지 않았나 싶다.
-한순간에 가수를 그만 둔 것을 보면 한성호라는 인물의 자존심은 최고가 아니면, 남들보다 앞서지 못하면 자신의 꿈도 접을 정도로 센 것같다.
그렇다고 해야 하나(웃음). 어찌됐건 대충 사는 방식은 나 자신이 절대 용납하지 못하는 건 분명하다. 내가 만약에 젊은 시절 적당히 음악하고 적당한 가수였으면 지금의 삶을 이루진 못했을 거다. 안 되는 건 빨리 포기하고 내가 최선을 다하고 잘 할 수 있는 작곡가, 작사가, 프로듀서의 길을 간 게 최선이자 최고의 선택이었지 싶다.
‘투헤븐’으로 다시 예를 들어도 될까. 처음에는 저 노래를 내가 불렀으면 잘 되는 것 아닌가 하고 안타까워했다. 그런데 내가 부른 ‘투헤븐’은 달랐을 것이다. 느낌이. 작곡가 활동을 하면서 결국 ‘투헤븐’은 조성모의 노래란걸 깨달았다. 그러니까 그렇게 잘하지 않았나. 지나와 보니 얼마전 TV 프로 ‘동상이몽’에서도 그런 얘기를 했는데 ‘나를 과대포장하면서부터 실패의 시작이 되고, 나를 객관화하면서부터 성공이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가수로, 작곡가, 프로듀서로 나를 객관화 시키면서 일에 더 도움이 됐다. 어릴 때 그렇게 생각했으면 좋았겠지만, 또 그렇지 않아서 오히려 내가 단단해지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 자신을 객관화해 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것같다. 2006년 FNC를 설립한 즈음이 자신을 객관화한 시발점인지
작곡가로 한창 활동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더너츠의 ‘잔소리’가 히트를 치고 SG 워너비, 씨야 등과 일하던 시기다. 내 곡들이 타이틀로 자주 들어갔는데 이상하게 내게 맞지 않은 옷을 입은 어색함이 강했다. 작곡가로서 이런 장르의 노래들이 유행하니 흉내를 내서 쓰긴 하는데, ‘이거 아닌데’ 싶었던 거지. 작곡가와 프로듀서로서 시대 흐름에 맞춰 편하게 살려고 변한건가 하는 반성이 뒤통수를 강하게 때렸다.
일본을 자주 오가던 무렵이었는데 이럴 바에는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걸 하자고 결심했다. 그게 바로 밴드였다. 일본에서 한국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아! 밴드를 하자. 어릴 때 춤 가르치듯 악기를 가르쳐서 재능 있는 친구들에게 밴드를 하게 하자’고. 그 순간부터 이상하게도 실패할 거라는 두려움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냥 잘 될 것 같았다. 그냥 이렇게 하면 될 거라고 혼자 웃었다. ‘왜 진작 이 생각을 못 했지?’ 수준(웃음). 공항에 도착하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회사를 차렸다.
-명지대 밴드 화이트홀스 출신이다. 인기가 있었던 대학 밴드는 아닌데, 아이돌 밴드를 만들면서 실패할 거란 생각을 전혀 안 했다?
내가 대학 밴드를 할 때만 해도 저변이 꽤 두터웠다. 신촌 지역에는 연대 소나기, 항공대 활주로, 홍대 블랙 테트라 등 가요제 출신 유명 밴드들이 많았고 가끔 조인트 공연을 했다. 밴드가 좋아 대학에 들어가서 바로 화이트홀스에 들어갔는데 내 윗 기수가 모두 일찍 군대를 갔다. 그래서 1학년인데도 선배들이랑 같이 무대를 섰다.
나는 그 때부터 밴드 음악이 너무 좋았다. 밴드라도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대중이 모두 함께하는 음악이 좋았다. 그 때 당시에도 왜 굳이 우리 정서에 맞지 않는, 한쪽으로 치우치는 밴드 음악만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많을까 의구심이 강하게 들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음악을 한 사람이 아니니까, 밴드를 어떻게 만들면 되겠다는 기초를 거기서 만들었다. 운 좋게도 선배들이 많이 없어 내가 공연을 하고 많은 무대를 서면서 밴드 음악을 간접경험을 했다.
-FNC에 대한 일부 비판적 입장에서는 밴드로 아이돌을 만들어 돈을 번다고 한다. 이에 대해 한 대표는 대학 때부터 밴드에 대해 방향 설정이 확고한 듯 싶은데
내 소신은 워낙 확고했다. 밴드하면 배고파야 한다? 마니아만 들어야한다?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FT아일랜드와 씨엔블루가 한국 및 해외 음악시장에서 밴드 음악이 알려지는 데 단 1%라도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요즘은 오디션 프로에서 밴드들이 나오고 기타를 치는 어린 친구들을 자주 볼 수 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춤, 노래가 다였다. 힙합이 언더였는데 대중화되면서 모두가 따라하게 됐다. 어떤 장르든 그 장르가 발전하려면 스타가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초창기 밴드를 보면, 김창완의 산울림처럼 다 대학교 밴드에서 시작했다. 다 나와 태생이 같은 스쿨 밴드들이다. 이 학교 저 학교 연습을 하던 밴드가 있었고, 시작이 좀 다르다 해도 과거에는 그런 차별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한동안 국내에 밴드 음악 시장이 사라지다시피 했다. 너무 아웃사이더로 가 있다 보니 우리나라에서는 밴드는 인디에서만 해야 한다는 인식이 생기지 않았을까. 외국에서도 인디 레이블에서 오버로 오고 그런 경우가 많다. 미국도 기획사에서 만든 밴드들이 상당수다. 내 처음 꿈이, FNC라는 회사를 통해 처음 회사를 할 때 지금 대형기획사가 있으면 우리 회사의 정체성을 무엇으로 가질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것이)밴드라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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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C, SBS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