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김범석의 사이드미러] ‘베테랑’이 올 여름 최소 500만은 확보할 탑픽 영화가 될 거란 확신이 든 건 단순히 주먹을 부르는 재벌 3세의 손목에 기어이 수갑이 채워지는 통쾌함 때문만은 아니다. 형사소송법을 우습게 여기고 사람을 가축 보듯 하는 천박한 재벌가 도련님을 악착같이 때려잡고야 마는 광수대 형사의 고군분투도 만약 이게 부족했다면 ‘공공의 적’ 강철중 보다 겨우 반 보 앞선 인물이 되는데 그쳤을지 모른다.
‘베테랑’이 스키드마크 자국 뚜렷한 류승완 식 액션극에 충실하면서 다소 음습했던 전작 ‘부당거래’ ‘베를린’을 앞서는 작품이 될 수 있었던 건 감독이 끝까지 방심하지 않고 부여한 유머와 영화적 온기 덕분이다. 쉬운 얘기를 어렵게 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어려운 얘기를 귀에 감기게끔 쉽게 풀어내는 건 통찰력을 갖춘 선수들의 영역인데 ‘베테랑’은 류승완이 이 분야의 고수임을 123분간 쉼 없이 보여준다. 이제 그는 자신의 주 종목에서 슬슬 하산해도 될 듯싶다.
서도철(황정민)은 피가 뜨겁고 흥이 넘치는 광수대 형사다. 오랜 기획 수사 끝에 중고차 해외 밀반입 용의자들을 일망타진하는 순간에도 승진 생각에 들떠 범인들 앞에서 약 올리듯 어깨춤을 추는 도철. 범인에게 수갑을 던져주고 “뭐 하냐? 안 차고?”라고 묻는 엉뚱한 호기도 부린다. 적당히 때 묻은 이 능력남을 사람들은 좋아하고, 친분 있는 연예기획사 대표의 초대로 드라마 파티까지 가게 된다. 그곳에서 연예인 스폰서 재벌 3세 조태오(유아인)를 소개받고 그의 망측한 모습을 목격한 도철은 직감적으로 범죄의 구린 냄새를 맡게 된다.
첫 대면부터 송곳니를 드러낸 두 남자가 만약 이날 분노의 난타전을 벌였다면 류승완은 타고난 이야기꾼이 아니다. 도철은 건방 떠는 태오에게 “참 재밌게 사는 분 같은데 죄는 짓지 마시라”고 타이르며 자리를 뜬다. 이 말은 이 영화의 중요한 복선이자 동력이 된다. 냉탕과 열탕 같은 둘이 다시 만나는 건 ‘어이없는’ 화물트럭 기사의 투신 때문이다. 억울하게 해고된 배기사(정웅인)가 배후인 신진그룹 본사에서 1인 시위를 벌이다가 태오 눈에 띄게 되고, 불과 몇 시간 만에 그 건물에서 투신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관할 경찰서와 언론은 이를 은폐하기 바쁘고 도철은 신세졌던 배기사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다 실체적 진실에 접근한다. 그러나 돈의 힘은 생각보다 막강하고, 태오를 비호하는 인의 장막 역시 몇 겹으로 둘러싸인 상황. 거대한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돈키호테처럼 도철의 무모해 보이는 선전포고는 급기야 경찰청장과 아내의 심기까지 건드리며 점점 파국으로 향하게 되는데.
‘베테랑’은 황정민의 중량감과 진가를 거듭 확인할 수 있는 무대이면서 유아인이라는 괴물 배우를 잘 활용해낸 오락물이기도 하다. 때와 장소에 따라 능수능란하게 가면을 바꿔 쓰는 가증스럽고 위선적인 태오를 전형적이지 않게 표현한 솜씨가 매우 인상적이다. 한쪽 입술을 씰룩거리며 야비한 미소를 흘리거나 상대를 경멸하는 레이저 눈빛도 최대한 절제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억압됐던 본성과 야만성이 용수철처럼 튀어나올 때 유아인은 태오가 얼마나 비열하고 천박한 놈인지 실감나게 보여준다.
세컨드 자식이라는 콤플렉스와 아버지에게 알짜 계열사를 물려받기 위해 발버둥치는 모습, 동변상련 처지의 최상무(유해진)를 닦달해 충견처럼 길들이는 설정 등은 어느 특정 재벌가를 연상케 하며 몰입감을 고조시킨다. 그룹 오너를 담당한 기업인들과 재벌 2, 3세 사건을 수사한 형사들의 증언과 목격담, 뒷얘기들이 한데 섞이며 영화의 사실감을 높여준다.
투톱 못잖게 기량을 발휘한 조연들의 활약도 영화를 한층 풍성하게 해준다. 태오의 심복이자 그가 여기저기 싼 똥을 치워주는 집사 최상무 역의 유해진은 “깍지 낄까요?” 대사를 빼고 모처럼 웃음기를 거둬들인 연기로 존재감을 보여준다. 기대 반 우려 반이던 장윤주도 평균점수를 깎아 먹지 않으며 꽤 인상적인 장면을 선보인다. 영화 연출 전공자답게 톤 앤 매너를 잘 읽어냈고 작품에 스며들었다. ‘무한도전’에서 보여준 발차기 덕분에 캐스팅 됐다는데 류승완은 그 회심의 하이킥을 정두홍 무술감독과 멋지게 재현해낸다.
지난 설 연휴에서 5월, 다시 여름 방학으로 개봉이 미뤄진 건 영화적 결함이 아닌, 출전 선수가 미덥지 못 했던 CJ의 말 못할 집안 사정 때문이었다. 8월 5일 개봉 역시 ‘암살’ ‘미션 임파서블5’를 의식한 택일이지만 상대적으로 약체인 ‘탐정’으로 맞아야 할 9월 추석 시즌까지 롱런을 염두에 둔 포석이기도 하다. 유아인은 송강호와 호흡을 맞춘 쇼박스 추석 영화 ‘사도’로 8~9월 극장가를 종횡무진하게 됐다. 마약 흡입 장면과 환각 파티를 다뤘지만 예상을 깨고 15세 관람가가 나왔다. /bskim012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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