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김범석의 사이드미러] 주어진 시간은 딱 한 달. 눈 질끈 감고 30일만 짠순이 주부로 살면 다시 화려한 미혼 변호사로 인생이 재부팅된다. 하루하루가 구질구질함의 연속이지만 까짓 서민 체험이라 여기면 못 버틸 것도 없다. 일이 이렇게 꼬인 건 그 놈의 교통사고와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중간계 직원들의 업무 착오 때문이다.
맘 같아선 당장 저승사자들을 업무상 과실 치사로 고소하고 싶지만 화려한 싱글로의 컴백을 약속받은 마당에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은 연우는 이 시한부 줌마 인생을 한번 감내해보기로 한다. 필요 이상으로 미남인 말단 공무원 남편과 빠듯한 생활비를 호시탐탐 노리는 중학생 딸, 늦둥이 유치원생 아들이 혹처럼 나타났지만 노력 없이 가족이 생겼다는 호기심도 살짝 발동된다.
우아하게 브런치를 즐기던 연우는 매일 아침 밥 타령하는 남편 때문에 팔자에도 없는 쌀을 씻고, 장당 30원씩 쳐주는 종이 백도 접어야 한다. 난생 처음 겪는 카드 한도와 수준 안 맞는 이웃들과의 커피 수다도 스트레스다. 화가 뻗칠수록 정체를 숨겨야 하는 그녀는 복식호흡하며 자신을 타이른다. ‘한 달이면 돌아간다. 어떻게든 버티자’라고.
‘미쓰 와이프’의 원제는 ‘멋진 악몽’이었다. 공교롭게 둘 다 형용모순이다. 악몽이 아무리 그럴 듯해도 멋질 리 없고, 와이프가 미스일 수 없지만 영화를 보다보면 제작진이 왜 이 형용 모순을 고집했는지 알 수 있다. 반복되는 일상과 가족이 초록불 깜빡이게 하는 배터리 충전소임에도 우린 너무 쉽게 우리 곁에 머물고 있는 행복에 불친절한 건 아닌지.
손에 움켜쥔 게 많을수록 작은 손을 원망하고, 좀처럼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과 소비가 과연 행복과 얼마나 비례하는지 이 영화는 묻는다. 이미 행복할 이유가 산처럼 쌓였음에도 심리적 공복감에 허덕이는 이유가 혹시 중요한 일과 쫓기는 일을 혼동하며 살고 있기 때문은 아닌지 가슴에 손을 얹게 만든다.
‘조폭마누라’ 각본을 시작으로 ‘펀치 레이디’ ‘육혈포 강도단’을 쓰고 연출한 강효진 감독은 충무로에서 보기 드문 여배우 영화 전문 연출가다. 뜻하지 않게 타인의 인생을 살게 되고 그 과정에서 소중한 뭔가를 깨닫게 되는 연우처럼 강효진 감독 역시 이 영화와의 만남이 운명적이었을 것이다. 2012년 결혼식 축의금 3000만원을 몽땅 들고 강원도에서 찍은 ‘나쁜 피’ 이후 백수로 보낸 3년 만의 컴백이었기 때문이다.
휴먼 코미디에서 독보적인 능력을 인정받은 엄정화는 대척점의 두 인물을 코믹하면서도 포인트를 잘 잡아 표현해낸다. 힘을 줘 연기할 때와 그렇지 않은 지점을 정확히 구분해 관객을 편하게 만드는 것 역시 배우의 중요한 균형 감각인데 시종일관 내공이 느껴졌다. 치밀한 서사와 복선, 미장센이 아닌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와 반전에 집중한 ‘미쓰 와이프’는 엄정화의 폭넓은 쓰임새가 새삼 확인되는 무대다. ‘해운대’ ‘베스트셀러’ ‘댄싱퀸’ ‘몽타주’를 잇지 못한 작년 ‘관능의 법칙’의 흥행 아쉬움을 이 영화로 만회할지 주목된다.
송승헌도 모처럼 폼생폼사에서 벗어나 능청맞은 애처가 성환 역을 맡아 어깨 힘을 뺀 생활 연기를 보여준다. 데뷔작인 시트콤 ‘남자 셋 여자 셋’이 연상될 만큼 천연덕스런 코믹 연기도 영화에 잘 스며들었다. 성실하고 반듯한 구청 공무원인 그가 하극상까지 벌이며 아내에 대한 마음을 표출할 땐 많은 여성 관객들이 그를 연호하게 될 것 같다.
다만, 서민 동네가 나오는 한국 영화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재개발 설정과 갈등이 식상하고, 웃음에서 슬픔으로 전환되는 변곡점도 다소 작위적으로 다가와 아쉬웠다. 후반부 반전도 관객들의 누선을 자극하기에 부족하지 않지만 워낙 강렬했던 ‘헬로 고스트’의 미나리 김밥에 비하면 강도 면에서 볼륨이 약했다. 메가박스 엠플러스 라인업으로 이병헌 전도연 주연 ‘협녀’와 같은 날(13일) 개봉한다. 착한 영화의 유통 기한이자 연우에게 각별했던 4주를 잘 버틸 수 있을지 관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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