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연정훈(38)은 최근 종영한 SBS ‘가면’을 통해 역대급 ‘나쁜놈’으로 등극했다. 사실 그의 악역 연기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는 전작 OCN ‘뱀파이어 검사’ 시리즈와 MBN ‘사랑도 돈이 되나요’ 등의 작품들에서도 강한 연기를 선보이며 여러 차례 연기 변신을 시도했지만, 대중들에게 그는 여전히 부드러운 이미지를 가진 ‘훈남’이라고 각인돼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이번 ‘가면’에서는 민석훈 역을 맡아 칼을 간 듯 작정한 악인 연기를 보여주며 시청자들을 홀렸다. 연정훈의 말에 따르면 아내인 한가인조차 “처음에는 착한 애가 나쁜 척 하는 것 같았는데, 10회가 지나니까 정말 나쁜 놈이 있더라”라고 감탄할 정도.
“절대악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전의 악역 비슷했던 역할에서는 착하다가 악해졌다 반복되는 굴곡이 있는 인생을 그리는 것에 재미를 느꼈었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처음부터 악마이자 악인이었던 역할이잖아요. 사실 공중파 드라마에서 이렇게 악한 역할을 만나기는 힘들었는데, 연민을 느끼기 힘든 역할을 해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차갑고, 냉철한 또는 영화 ‘데블스 에드버킷’처럼 악마와 거래를 하는 듯한 모습을 그려보고 싶었기 때문에 오히려 저한테는 재밌었던 작품이었어요. 욕을 많이 먹을지언정 이렇게 가야 재밌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연정훈은 악역 연기에 대해 “마음속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서 표현할 수 있어서 속이 시원하다”라며 장점을 꼽기도 했다. 하지만 남을 끊임없이 미워하는 일 또한 많은 에너지와 체력을 요하는 일이다. 특히 민석훈의 경우에는 극이 진행되는 20회 내내 극한의 감정을 달리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이를 연기하는 연정훈은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계속 압박을 해야 하고 텐션을 이끌어나가야 하는 부분이 있었어요. 저도 사람인지라 20부를 하다보면 힘들더라고요. 특히 결말이 확정된 상태로 연기했기 때문에 엔딩이 잘 보이려면 중간에서부터 석훈의 감정선을 잘 정리해야하는 어려움이 있었어요. 미연이나 지숙에 대한 감정, 그리고 은하를 얼마만큼 사랑했는지 등을 알아야했거든요.“
배우들은 흔히 작품에 임할 때 ‘빠져든다’라는 말처럼 배역에 몰입하는 경우가 많다. 심한 경우에는 캐릭터에 맞게 현실의 성격 또한 변하기도 한다는데, 민석훈처럼 강한 성격의 캐릭터를 연기한 연정훈은 어땠을까.
“저는 몰입을 했다가도 빨리 빠져나오려고 노력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안 그러면 힘드니까. 그런데 석훈을 하면서는 다른 작품을 할 때보다 많이 몰입을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중반 정도에는 공허함도 느끼고 심적으로 힘든 부분이 있었어요. 지숙이 울트라 파워가 생기며 다 적이 되는 느낌을 받았을 때는 ‘(빠져들지 않게) 조심해야겠다’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민석훈은 모두가 혀를 내두를 정도로 독보적인 악역 캐릭터였지만, 이를 연기한 연정훈이 생각하는 악역은 사실 따로 있었다. 바로 제목처럼 가면을 쓴 채 다른 사람의 인생을 대신 살아야했던 변지숙이 그 주인공이다.
“많은 분들이 민석훈이 굉장히 못됐다고 얘기하지만, 저는 석훈을 연기했기 때문에 그 감정선을 따라가다 보면 지숙이 굉장히 못됐다고 생각해요. 석훈은 사채 빚에 허덕여서 죽기 일보 직전인 지숙을 살려줬지, 돈 줬지, 재벌가의 허우대 멀쩡한 남자 붙여주지, 데리고 놀았던 남자 나타나니까 없애주지, 사채업자 묻어주지...얼마나 좋나요. 결과적으로 다 지숙을 위했던 일이에요. 제가 이런 말을 하니까 유인영씨가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내가 악역을 많이 해봤는데 악역하면 다 그렇게 생각해. 자기가 안 나쁘다고’“
연정훈은 일부 시청자들이 ‘가면’의 지지부진한 전개에 대해 느꼈던 아쉬움도 모두 알고 있었다.
“시놉시스의 내용보다는 조금 다른 부분들이 있기는 했어요. 어쨌든 배우들의 생각으로 되는 건 아니니까. 연기하다보면 ‘어디까지 진행을 하고 싶은 거지’라는 의문점이 드는 부분들이 있었어요. 그러한 부분들을 보며 ‘다른 방향으로 가야하나’라며 조금 헷갈림이 있었는데, 그 때 다시 시놉시스를 꺼내보니 제가 힘을 빼게 되면 드라마의 악역 자체가 없어지는 것 같아서 오히려 강하게 밀어붙였어요. 마지막인 20부까지 가려면 흔들리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거든요. 다른 배우들한테도 각인을 시켜줬죠. ‘너희가 힘을 잃으면 안 된다’고. 수애나 (주)지훈이, (유)인영이 모두 힘들어했지만 저희끼리 단합을 해서 그나마 더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을 막았던 것 같아요.”
‘가면’은 미연이 자살하며 마무리되는 다소 충격적인 결말로도 많은 이목을 집중시킨 바 있다. 이에 대해서도 연정훈은 더욱 극적일 수도 있었다며 자신의 기대보다 잔잔한(?) 결말에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가면’의 결말은 처음부터 정해져있었어요. 시놉시스에서는 주인공인 지숙과 민우 커플도 해피엔딩이 아니었고, 미연과 석훈도 더 극적인 상황이었어요. 원래는 미연이 마지막으로 만난 석훈을 기절시켜서 호텔 방에 데려간 뒤, 테이프로 묶은 다음 그를 끌어안고 자살하는 것으로 끝났었어요. 미연은 그렇게 해서라도 석훈의 마음에 평생 남겠다는 목적을 이루는 것이었죠. 대한민국 공중파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장면인데, 만약 방송 됐다면 센세이션을 일으켰을 것 같아요.”
“엔딩에 있어서는 주어진 상황 안에서 최선을 다했던 것 같아요. 드라마라는 게 한 작가가 쓰다보면 모든 캐릭터에 100% 이입할 수 없는 한계가 있어요. 초반에는 캐릭터를 형성하기 위해 대본을 많이 따랐었는데, 마지막에는 놓치고 가는 부분들이 생겼었어요. 안 놓치고 마무리하려고 노력했죠. 다른 배우과도 얘기를 많이 했어요. 네 명이서 잘 끝내보려고 신경을 많이 썼거든요. 배우들 사이에서는 최선을 다했던 엔딩이었던 것 같아요.”
연정훈은 이번 작품을 통해 악역으로서의 그의 연기를 대중들에게 확실히 각인시켰을 뿐만 아니라, 함께 호흡을 맞춘 배우들과의 우정이라는 소중한 보상을 얻기도 했다.
“악역을 하다 보니 감정을 극대화시키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에, 예전에 연기했던 캐릭터들보다 감정을 많이 끄집어 낼 수 있었어요. ‘내가 이렇게까지 무서워 보일 수도 있을까’ 했는데 주변 사람들이 이끌어줘서 새로운 면들도 많이 찾았던 것 같아요. 일단 다른 배우 분들께서 너무 잘 해주셔서 같이 시너지 효과를 많이 받았어요. 얼마 전에 주지훈씨와 소주를 마시는데 ‘이제껏 작품을 하며 드라마 내용과는 상관없이 너무 팀이 좋았다. 연기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팀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느껴본 적이 별로 없었다’라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함께 작품을 하는 일원으로서 그런 얘기를 들으니 기분이 좋았어요. 수애씨도 마찬가지로 그런 얘기를 했어요. 네 명이서 어울리기도 많이 어울렸고, 재미있는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가면’은 지난 달 30일부로 막을 내렸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작품이었지만, 배우들의 열연으로 좋은 성적표를 얻어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었다.
“가면은 저한테는 여운이 오래갈 것 같아요. 다른 분들이 결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궁금해요. 사실 드라마를 하면서 그렇게 결말을 내본 게 처음인 것 같아요. 처음에 악마로 시작해서 결국 참회를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렇게 공중파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엔딩을 찍고 나니 마음이 굉장히 아프더라고요. 아쉬운 부분이야 항상 있지만, 그것보다 마음에 찡하게 와 닿았어요. 앞으로의 연기 인생에 있어서 하나의 재밌게 작업했던 드라마로 남을 것 같고, 배우들이나 스태프들한테 너무 고마워요. 쫑파티 당시 ‘최호철 작가가 멜로를 안 쓰고 액션이나 다른 대본을 준다면 할 의향이 있다’고 얘기하기도 했어요.” / jsy901104@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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