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소심한 억척 주부의 대범한 사회 복수극
OSEN 손남원 기자
발행 2015.08.10 08: 59

[OSEN=김범석의 사이드미러] 큰돈을 만지려면 근로 소득 보다 생산 수단을 갖는데 힘써야 한다. 일해서 버는 건 한계가 있는 만큼, 거꾸로 돈한테 일을 시켜야 한다는 역발상이다. 웬만한 월급쟁이는 치솟는 물가 상승률을 이겨내기 어렵고 주식, 달러, 금, 상가 같은 실물 자산을 손에 쥐고 저글링 하듯 금리 변화에 민첩해야만 부자가 된다는 얘기다.
 그런 의미에서 열심과 성실이란 키워드는 어쩌면 꾸준한 노동력 창출과 잉여 가치를 바라는 자본가들이 설파하는 음습한 지배 이데올로기인지도 모른다. 물론 자수성가형 부자가 있고, 짠순이 정신으로 10억을 모으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지만 어쩐지 ‘성실=성공’이란 슬로건은 점점 퇴색돼가고 있는 것 같은 요지경이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누구보다 바지런하고 성실하게 살았지만 쌓이는 빚더미에 궁지에 몰린, 손재주 좋은 주부 수남(이정현)의 세상을 향한 복수극이다. 주판과 타자를 다루던 그녀의 현란한 손이 어떻게 변하는지가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다. 여상을 나와 자격증을 14개나 따고, 신문배달과 식당 허드렛일을 하며 가까스로 내 집 마련을 했지만 감당 안 되는 가계 부채 때문에 머리가 터지기 일보직전인 수남.

그런 그녀에게 다시없을 기회가 찾아온다. 재개발 발표 후 두 패로 쪼개진 옆 동네의 서명만 받아내면 지긋지긋한 빚을 한 방에 해결하고 집값도 뛰어 가난과 굿바이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돈 앞에서 세상은 수남에게 호의적일 리 없고, 그녀는 앵벌이 하듯 받아내는 서명 구걸 과정에서 심한 모욕감을 겪고 급기야 미필적 고의로 인한 살인사건에까지 휘말리게 된다.
4년 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더블 클러치’로 단편 부문 대상을 수상한 안국진 감독의 첫 장편이다. 올 여름 16회 전주영화제에서 한국경쟁 부문 대상을 받은 이 영화는 박찬욱 장훈 감독 등으로부터 극찬을 받았고, 시나리오를 본 박찬욱이 ‘파란만장’으로 친분을 쌓은 이정현에게 출연을 권하며 산파 역할을 자처했다.
노개런티로 참여한 이정현은 가수와 중국 활동으로 비운 국내 연기 공백이 야속할 만큼 기량을 발휘한다. 마치 ‘명량’ 정씨 부인의 짧은 분량을 한풀이라도 하듯 90분간 원맨쇼처럼 벌이는 변화무쌍한 표현력이 흠잡을 데 없다. 극단을 치닫는 순수함과 광적인 연기를 이물감 없이 자유자재로 오갈 뿐 아니라 후반부로 갈수록 관객을 집중시키는 몰입도의 볼륨 확장 역시 빼어났다.
가녀린 체구에서 순간순간 뿜어져 나오는 광기어린 연기는 생계를 위해 악착같이 살았던 수남이 살인 사건에 얽혀 괴물이 돼가는 반전과 겹치며 흥미를 돋운다. 명함을 표창처럼 날리고, 신문도 목표점에 정확히 던져 넣는 생활의 달인 수남의 손기술이 위기 때마다 발휘되는 모습 역시 블랙코미디답게 섬뜩하면서 유머를 잃지 않는다. 공업용이긴 하지만 세탁기와 복어가 이렇게 공포스럽게 전달되는 것 역시 생경했다.
독창적인 스토리와 풍부한 상상력으로 빚어진 기획 의도는 밑줄 그을 만 했지만 ‘친절한 금자씨’가 연상되는 톤 앤 매너와 어디선가 본 듯한 연출, 뒤로 갈수록 뻔해지는 결말 등은 아쉬웠다. 경희대 연영과 출신 감독과 이정현을 비롯해 80년생 동갑내기 스태프들이 많아 졸업 작품 찍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청불로 13일 개봉./bskim0129@gmail.com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스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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