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는 연기로 말한다'고 했던가. 그럼 이병헌은 최소 달변가다.
이병헌은 13일 개봉한 영화 '협녀: 칼의 기억'(감독 박흥식, 제작 TPS컴퍼니, 이하 '협녀')에서 유백 역을 맡았다. 한국에서 익숙지가 않은 검술액션 장르. 뭐든 때리고 부수는 호쾌함 대신에, 공기를 베는 칼과 칼의 부딪힘과 찰나의 순간에 목숨이 오고가는 긴장의 연속을 품었다. 이병헌은 그 주축에서 유백 그 자체가 됐다.
'협녀'는 칼을 쥔 자가 무엇이라도 할 수 있던 고려시대 말, 서로 다른 길을 걸었던 세 검객의 이야기다. 이병헌은 최고의 자리를 향해 다가가는 권력자 유백 역을 맡았다. 한때 새로운 세상을 꿈꿨으나, 권력욕에 사로잡혀 동료를 배신하고 그들과 다른 길을 걷게 된 인물이다. 천출 신분 임에도 불구하고, 검술과 카리스마로 왕의 자리까지 넘보지만, 끊어내지 못하는 사랑에 고통스러워하는 복잡한 캐릭터다.
이병헌은 '협녀' 속 시간의 흐름을 고스란히 입어가며 변화된 인물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표현했다. 순수했던 과거, 솔직했던 사랑법, 꿈틀대는 욕망과 카리스마에 지배당해 잔인하고 싸늘해진 권력가의 모습까지를, 완벽하게 표현했다. 더할 나위 없는 연기, 이병헌에 앞서 제의를 받았다던 7명의 남자 배우들의 거절마저 고마워지는 순간이다.
입체적인 캐릭터 유백을 이렇게까지 실감나게 보여줄 수 있는 건 그가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쌓았던 그간의 연기 내공이 캐릭터에 녹아들어 또렷하게 발현됐기 때문이다. 앞서 연기했던 '터미네이터:제네시스'의 T1000과 2012년 천만관객을 동원해 사극붐을 일으켰던 '광해, 왕이 든 남자'에서의 역할이 전혀 떠오르지 않는 것도 이병헌의 연기 탓이다.
이병헌을 둘러쌌던 일련의 구설수가 눈에 밟혔던 이들도 스크린에 영화가 상영되는 120분의 런닝타임 만큼은 그저 고려시대의 야심가 유백만이 보일 것으로 확신한다. 시시곳곳 자신을 노리는 자객이 넘쳐나는 시대에, 온갖 함정들로 가득찬 처소에서 고독에 익숙해진 유백이 그저 더 쓸쓸해 보일 뿐이다.
어쩌면 '협녀'라는 타이틀이 무색할 만큼, 그가 쉼 없이 뿜어내는 연기 카리스마와 아우라가 스크린을 가득 뒤덮는 모습을 즐기기엔 이 120분이라는 런닝타임조차도 짧게 느껴질 것이다. / gato@osen.co.kr
'협녀' 스틸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