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회사에서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할 사람이 많지 않을까요?"(배우 김의석).
17일 오후 서울 건대입구 롯데시네마에서 영화 '오피스'가 공개됐다. 연출을 맡은 홍원찬 감독은 이 영화가 드라마 '미생'보다는 영화 '여고괴담'에 보다 가깝다고 말했지만, 이는 그가 말했듯이 '미생'을 거의 보지 못해서일지도 모른다. 영화를 보면 '미생'의 환영을 지울 수가 없다. 미로 같은 파티션, 임시완을 구제했던 상사의 슬리퍼, 보고서에 짓눌려 있는 책상 등의 풍경이 낯익다.
고아성이 분한 인턴 사원 이미례에서도 임시완의 장그래를 찾을 수 있다. 순진한 얼굴과 말투에 뭔가 주눅들어 있는 표정. 그를 무시하는 주위의 시선들. 그래서 끊임없이 눈치를 봐야하는 불안한 동공, 어딘가 불편해보이는 정장, 뇌구조에서 가장 크게 차지하는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의 전환 여부. 여기에 내가 다른 사람보다 못하다는 열.등.감.
하지만 '오피스'가 '미생'과 갖는 가장 큰 차이점은 회사의 정서다. 장그래가 아무리 핍박받는 환경에 있을지언정 정서는 따뜻했다. 반면 '오피스'의 회사는 차갑고 메마르다. '미생'에서 감동적인 부분들을 모두 걸러낸다면 굳이 노력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이 같은 호러 버전이 탄생했을 것만 같다.
그래서 고아성은 임시완과 다르다. 장그래에게는 그를 구박하면서도 감싸주는 츤데레 오 차장이 있었고, 담백한 듯 따뜻하게 현실 조언을 해주는 선배 김대리가 있었고, 누나같고 친구같은 동기 안영미가 있었다. 라이벌이었던 장백기는 장그래와 비교도 하지 못할 스펙을 갖췄음에도, 장그래에게 살짝 뒤쳐지기까지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집에가면 엄마가 있었다. 장그래는 사실상 원인터네셔널의 히어로였다.
하지만 이미례에게는 그를 눈엣가시처럼만 보는 김 부장이 있고, 정직원이 됐으면 벌써 됐을거라고 까기만 하는 선배 홍 대리가 있고, 눈치없다고 쑥덕대기만 하는 남자 선배가 있다. 라이벌 신다미는 역시 이미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한 스펙을 갖췄고, 그 만큼 제대로 대우를 받는다. 그리고 광주 출신으로 취업을 위해 서울로 온 이미례는 집에 가도 그를 반겨주는 것은 적막한 어둠 뿐이다. 옆집에 사는 어딘가 살짝 이상한 여자도 미례의 친구가 돼 주진 못한다. 그리고 그나마 그를 인간적으로 대해주던 김 과장은 돌연 사라졌다. 이미례는 루저다.
여기에서 공포가 발생한다. 열심히 하면 할수록 열심히 한다고 욕을 하는 사람들 속에서 유일하게 믿고 의지하던 사람이 사라지고, 라이벌의 등장에 주인공의 히스테리는 극에 달하게 된다. 주인공에게 이는 단순히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문제가 기본적인 인간 존엄성의 문제다. 온 가족을 무참히 살해하고 사라진 김 과장은 '서로를 잡아먹기 위해 침을 흘리고 피를 흘리며 경쟁을 하는 야수들의 세계'라고 회사를 표현했다.
홍 감독이 말한 것처럼 '여고괴담'이 입시지옥을 호러로 풀었다면 '오피스'는 한국 직장인의 스트레스를 스릴러 장르로 표현했다. '오피스'가 갖는 영화의 순기능이라면 관객이 가진 직장 스트레스를 상상을 통해 풀어주는 것일 테다. 공포스럽지만 한편으로는 본인이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대리만족.
파티션이나 책상, 화장실은 서스펜스의 공간이, 야근은 공포의 시간이 된다. 낭자한 피보다 고아성의 음산한 웃음과 서늘한 눈빛이 더 무섭다. 그리고 더 무서운 것은 현실이 '미생'보다 '오피스'와 더 닮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고아성, 배성우, 박성웅, 김의성, 류현경, 이채은, 박정민 등 출연. 15세 관람가. 27일 개봉. / nyc@osen.co.kr
'오피스' 포스터, 이대선 기자 sunday@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