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소녀 같았다. 맑고 순수하고 너무나 다정한 음색이어서 뭐라고 말할지 자꾸만 귀 기울이게 만들었다. 또 얼마나 부끄러움이 많던지 한마디 하고나서 빨개진 얼굴을 두 손에 묻고 '호호호'거리면서 쑥스럽게 웃었다. 배우 김성령은 어느덧 40대 후반에 접어들었지만 나이를 좀처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예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말투에서 오는 고상하고 우아함은 소탈하고 솔직한 대화를 통해 반전 매력으로 다가왔다.
김성령은 MBC 주말드라마 '여왕의 꽃'에서 자신의 목표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야망녀 레나정을 연기했다. '여왕의 꽃'은 막장드라마라고 불리는 소재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데, 주인공 여자가 남자가 아닌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어려움을 이겨내면서 사회의 상식을 깨뜨리는 과정이 그랬다. 또 엄마와 딸의 관계인지 알지 못했던 두 여자나 자신의 치부는 알지 못한 채 남을 끌어내리기 위해 혈안이 돼 있는 시어머니가 그랬다.
가슴을 치면서 볼 법한 막장의 요소를 어떤 이들은 재밌게 봤겠지만, 어떤 이들은 불편한 시선을 보내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설득력 없는 전개에도 김성령은 모든 것을 잊을 만큼의 열연을 펼쳤다. 기대 이상이었다. 그토록 소녀 같은 그녀가 분노를 표출하는 모습은 복잡한 레나정의 내면을 잘 표현해줬다.
김성령은 지난 26일 OSEN과의 인터뷰에서 "초반에는 저도 이 여자가 왜 저러나 싶었죠. 하지만 가진 게 아무 것도 없는 여자가 밑도 끝도 없이 성공을 바라는 게 아니에요. 고아라는 이유로 사랑하는 남자에게 버림 받고, 사람들에게 무시 받은 것들이 쌓이면서 성공해야겠다는 독한 마음이 생긴 것이죠. 그래도 아이를 버린 게 참 못됐다 싶다가도 점점 이해하고 불쌍하게 여기면서 나중에는 레나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레나가 너무 고생해서 잘 됐으면 좋겠다'는 응원의 댓글이 많아져서 행복했어요"라고 드라마를 마친 소감을 전했다.
지난 30일 마지막 방송에서 레나정은 남편 박민준(이종혁 분)과 재회하며 해피엔딩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김성령은 이 드라마를 통해 데뷔 후 처음으로 주연을 맡아 기대를 불러모았다.
"제가 주인공이라서 초반에는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드라마의 성공여부가 달라지는 줄 알았어요.(웃음) 하지만 오만했다는 생각이에요. 내가 잘 나서 어떻게 되는 게 아니라 드라마는 합동 작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죠."
자극적인 전개로 개연성이 부족하다는 분석도 나왔지만 김성령은 극중 마희라(김미숙 분), 최혜진(장영남 분)과 함께 '악녀 3인방'으로 불리며 큰 활약을 펼쳤다. 세 여자의 날카로운 신경전이 시청률을 높이는 데 높은 기여를 한 것이다. 김성령은 성공을 위해 아등바등 애쓰는 레나의 벼랑 끝 전술을 호기롭게 그려냈다.
김성령은 "선배님들이 중심을 잘 잡아주셔서 지치지 않고 잘 온 것 같아요. 김미숙, 송옥숙, 선우용녀 등 선배님들이 후배들보다 더 NG를 안내셨고, 혹시 내더라도 굉장히 미안해하시더라고요. 너무 좋은 선배님들과 연기한 것 같아요. 선배들이 괜히 선배가 아니에요. 저도 후배들을 받쳐주는 선배가 되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그는 슬픈 장면을 보고 금세 눈물을 뚝뚝 흘릴 정도로 감수성이 예민하지만 좋은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는 빈 그릇을 뚝딱 내놓을 정도로 털털하고 적극적인 면모도 있다. "촬영에 몰입하고나서 마음이 허하면 파전에 막걸리 한 잔으로로도 행복해진다"는 정감 있는 여배우였다.
"레나, 희라, 혜진 같은 여자들이 실제로 있을까 의구심을 갖는 분들도 계셨지만 '실제상황'이라는 프로그램을 보면 실제로 목적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여자들이 있더라고요. 세 사람이 너무 세서 악녀처럼 비춰졌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이 이해되기도 했어요. 드라마를 보던 제 아들이 '엄마는 안 저럴거지?'라고 묻더라고요. 나중에 며느리가 마음에 안들면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지만.(웃음) 이왕이면 좋은 며느리를 만났으면 하는 게 엄마의 마음인 것 같아요."
'악녀 케미' 못지않게 이성경과의 모녀 연기도 드라마를 보는 또 하나의 재미 요소로 꼽혔다. 실타래처럼 엉킨 이들의 복잡한 관계가 어떻게 풀어질지 관심이 집중됐던 것. 레나는 결국 전 남편 서인철(이형철 분)을 통해 강이솔(이성경 분)이 버린 딸이란 사실을 알게 됐다. "저도 사실 제일 기억에 남는 장면은 딸이 죽은 줄 알았다가 인철이한테 살아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예요. 대본을 받고 너무 슬펐거든요. 그 부분을 굉장히 몰입해서 찍어서 지금도 기억에 남아요"라고 회상했다.
김성령 역시 슬하에 두 아들(중2·초5)을 둔 대한민국의 아줌마다. 요즘에는 아이들의 교육에 올인하는 엄마들이 많지만 그녀는 아이들의 성향에 맞게 뒤에서 묵묵히 지지해주는 편이다.
"제 생황에 맞게 키우고 있어요. 촬영에 들어가면 아이들을 위한 시간을 낼 수 없기 때문에 방목할 수밖에 없어요. 엄마들이 자기 상황에 맞게 키워야지 어느 학원이 좋다고해서 다 따라하고 비교하면 안 될 것 같아요. 두 가지를 다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뒷바라지를 잘 못해주지만 드라마가 끝나면 하고싶은 것들을 꼭 주겠다고 약속해요. 얼마 전에는 작은 아들이 동물원에 가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엄마 촬영 끝나면 꼭 같이가자고 했죠.(웃음)"
그녀에겐 아직까지 보여주고 싶은 모습이 훨씬 많이 남아 있다.
"예능에서 제 밝은 면을 보여드렸는데 슬프고 사연 있는 캐릭터만 들어오더라고요. 우아한 역할이면 다들 제가 떠오르시나봐요. 중년의 로맨틱 코미디를 해보고 싶어요. 한 번만이라도 기회가 주어지면 잘 할 수 있을텐데 아쉽죠. 결국은 배우이기 때문에 좋은 배우로 남고 싶어요. 목표라고 말하기도 그렇지만, 사람들에게 그냥 좋은 배우였으면 좋겠어요."/ purplish@osen.co.kr
지형준 기자 jpnews@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