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김범석의 사이드미러] CCTV도 없는 그믐밤 골목길. 도둑고양이 보다 낯선 사람을 마주하는 게 훨씬 오싹한 것처럼 공포는 오히려 일상적일 때 가중된다. 직장인에게 어쩌면 집 보다 더 익숙한 공간인 회사 역시 때론 예상 못한 지옥으로 변해 모두를 집어삼킬 수 있다. ‘오피스’는 회사로 숨어든 일가족 살인 사건 용의자를 통해 인간성을 상실케 하는 자본주의의 무한 경쟁과 먹이사슬을 고발하는 독특한 스릴러다.
근면 성실하지만 융통성 없는 대기업 식품회사 영업2팀 김병국(배성우) 과장은 실적 우선주의 부장의 압박과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 사이에 끼어 하루하루를 버티는 ‘잉여’ 넥타이족이다. 미래가 암울하다고 판단한 심신 쇠약자 김 과장은 자포자기 심정으로 노모와 처자식을 잔혹하게 살해하고 쫓기는 신세가 된다. 사건을 배당받은 광수대 형사 종훈(박성웅)은 회사 동료들을 탐문하는 과정에서 뭔가 미심쩍은 게 있음을 직감하고 그들의 동태를 은밀히 살핀다.
범인의 행적을 쫓던 종훈은 뜻밖에 김 과장이 범행 후 회사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담긴 CCTV를 발견하지만 그가 나가는 모습은 찾지 못 한다. 그렇게 오리무중인 김 과장이 회사 어딘가에 숨어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 영업2팀 팀원들은 하나같이 불안 증세를 보이다가 잇따라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유일하게 김 과장의 서랍 속 비밀을 알고 있던 인턴사원 미례(고아성)는 종훈에게 사내 연쇄 살인의 단서가 될 정보를 제공하게 되는데.
지난 5월 열린 68회 칸 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 초청작인 ‘오피스’는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일상적 공간인 회사에서 벌어지는 인간들의 욕망과 어긋남, 이에 따른 뒤틀림과 파편으로 야기되는 인간성 말살을 세밀하게 그려낸다. ‘주말에 뭐 했냐. 교회? 새벽 기도 가고 대리점 하나 더 챙기라’고 다그치는 부장의 호통과 들쑥날쑥 춤추는 영업 실적 그래프는 픽션임에도 아찔하고 혈액 순환이 더뎌질 만큼 리얼하게 와 닿는다.
이 영화가 흥미롭고 독창적인 건 적재적소에 매설해놓은 의문부호들이 제법 잘 맞물리고 그럴듯하기 때문이다. 김 과장이 왜 그런 추악한 패륜 범죄를 저지른 뒤 회사로 들어온 건지, 동료들이 경찰에게 숨기려는 건 대체 무엇이고, 존재감 없는 비정규직 인턴사원은 어떤 이유로 김 과장과 은밀한 경험을 공유했고 선배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는지가 서로 유기적으로 인과관계를 맺으며 영화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마치 우주왕복선의 추진체가 하나씩 임무를 마치고 떨어져나가는 것처럼 후반부로 갈수록 영화는 궁금증이 해소되며 반전을 맞고 주제 역시 선명해진다.
나홍진과 함께 ‘추격자’ ‘황해’의 각색을 쓴 홍원찬 작가의 첫 장편 연출작. 감독은 자신이 가장 자신 있는 장르로 출사표를 던지며 칸 붉은 계단을 밟았고, 명필름부터 청어람, 데이지 등 영화사에서 근무하며 직장 생활한 제작자가 경험을 우려내 각본을 썼다. 우연의 일치인지 의도적 ‘스리 쿠션’ 디스인지 모르지만 제작자의 과거 상사 두 명의 이름이 극중 비슷하게 등장해 흥미를 돋운다.
감독의 무난한 초보 운전은 배우들의 중량감 있는 연기와 만나 한층 더 빛났다. 매번 분량 대비 뛰어난 몰입감을 선보인 김의성은 이번에도 신경질적이면서 음흉한 부장을 놀랍도록 표현해 영화를 풍성하게 했다. 부하들을 실적 기계로 여기고 특히 김병국 과장을 대놓고 무시, 멸시하는 모습이 자칫 전형적으로 비칠 수 있는데 이를 자신만의 색채로 체화해내는 솜씨가 발군이었다.
정규직 계약 직전, 새 경쟁자 인턴을 맞아 초조함을 느끼는 미례 역의 고아성도 왜 일찍이 봉준호가 발탁했고 또 다시 그를 부르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발성, 딕션 같은 기본기가 잘 다져진 배우라기 보단 어떤 배역이든 도화지에 잘 스며들게 하는 여백과 흡수력이 탁월한 연기자임을 이번에도 스스로 입증했다. 부서 내 ‘은따’인 김 과장을 인간적으로 동정하면서도 결코 그처럼 되지 않겠다는 욕망이 부딪치며 괴로워하는 인물을 입체적으로 잘 보여줬다.
끝까지 스릴러의 결을 유지하면서 중간 중간 공포 요소를 버무린 솜씨는 좋았지만 한정된 공간적 배경 탓에 영화가 단조로운 느낌을 주는 건 아쉬웠다. 갑갑한 느낌을 최소화하기 위해 무한 경쟁과 소통 부재를 상징하는 영업팀 간 파티션을 적극 활용한 연출 기법은 신인 감독의 재치였다. 15세 관람가로 칸 버전과 같은 111분. 리틀빅픽쳐스 배급으로 9월 3일 개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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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스' 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