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제균 감독 백업한 대기업 엘리트 영화인의 안타까운 죽음
OSEN 손남원 기자
발행 2015.09.04 17: 09

[OSEN=김범석의 사이드미러] 고인이 된 이상용(47) 전 와우픽쳐스 이사는 영화계에서 선비로 통하던 사람이었다. 늘 깔끔한 화이트 셔츠에 잘 다려진 바지를 즐겨 입어 상대를 기분 좋게 한 그는 일처리도 자신의 날선 바지 선처럼 정확하고 꼼꼼한 걸로 정평이 났다. 업무의 절반 이상이 영화사의 각종 제안을 거절하는 일이다보니 본의 아니게 ‘차갑고 냉정하다’는 평판도 따랐다.
 하지만 이는 일부는 맞고, 반 이상은 틀린 얘기다. 삼성영상사업단을 시작으로 15년 넘게 CJ엔터테인먼트 영화본부에서 투자를 비롯해 제작, 해외 파트에서 능력을 발휘한 그는 많은 영화인들이 흉금을 털어놓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대기업 직원이었다. 무엇보다 말이 잘 통할 만큼 유연한 사고를 가졌고, 누구보다 제작사의 고충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온정적인 사람이었다.
 ‘두사부일체’로 흥행했지만 차기작 ‘낭만자객’으로 실의에 빠져있던 윤제균 감독을 찾아가 ‘1번가의 기적’ ‘해운대’를 해보자고 용기를 불어넣어준 이도 다름 아닌 CJ엔터 이상용 이사였다. 같은 고려대도, 부산 출신도 아니었지만 천당에서 지옥으로 추락한 것 같은 낭패감에 빠져있던 윤제균은 포장마차에서 소주잔을 채워주며 “윤 감독, 얼마든지 재기할 수 있어”라고 용기를 불어넣어준 이상용 이사 덕분에 빨리 재부팅할 수 있었다.

 그를 처음 만난 건 2000년대 초반이었다. 좋은 시나리오를 찾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제작사를 탐방하던 그를 안세병원 사거리의 한 영화사에서 우연히 소개받았다. 영화 담당 초년병 기자였고 그도 과장급이었다. MBA 출신의 미국 유학 스펙과 유머러스한 언변이 기자를 주눅 들게 했지만 그는 “사실 미국 사람 앞에선 저도 뽀록 날까봐 시계 보며 바쁜 척한다”며 자신을 낮출 줄 알았다.
 그러나 그와의 인연이 늘 좋지만은 않았다. CJ가 계열사를 통한 극장 사업과 투자 배급에 이어 제작까지 영역을 뻗어나갈 무렵 그 선봉에 선 이가 그였기 때문이다. 막대한 자본을 앞세운 CJ엔터의 사업 확대가 많은 군소 제작사를 폐업하게 만들 것이란 위기감이 감돌았고 충무로 생태계를 어지럽힐 것이란 예측이 서서히 현실화되던 때이기도 했다.
 대기업 수직 계열화를 우려하는 비판의 목소리가 이어졌고 이를 취재하던 기자도 그때마다 이상용 이사와 껄끄러운 전화 통화를 몇 번이나 해야 했다. 급기야 시사회에서 얼굴을 보고도 서로 외면하고, 같은 테이블에 앉아서도 눈길 한번 마주치지 않을 만큼 냉랭했던 기간이 한동안 이어졌다. 조급한 마음에 팩트가 일부 틀리고 감정적으로 흥분한 기사를 전송하면서도 전혀 부끄러운 줄 모르던, 치기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였다.
 그런 그에게 먼저 전화를 건 건 그가 CJ를 사직하고 나온 뒤였다. 업무상 술자리 때문에 한때 위장에 천공이 발견돼 큰 고비를 넘겼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도 위로나 안부 문자를 보내지 않았다. 잘 나가는 감독, 배우들과 어울리고 영세한 영화사나 못 나가는 사람들은 만나주지도 않는 ‘그들만의 리그’의 주전 선수로 그를 단정했기 때문이다.
 CJ를 나와 KT에 잠시 몸담았던 그는 올해 초 김주성 대표와 와우픽쳐스라는 투자배급사를 차렸다. 직함은 이사였지만 지분과 오너 십이 있는 주인 자격이었다. 하지만 첫 작품 ‘상의원’에 이어 ‘연애의 맛’이 잇따라 흥행에 실패하며 첫 위기가 찾아왔다. 두 작품 모두 KT에서 들고 나온 작품이었고 여러 우려와 반대가 있었지만 이상용 이사가 ‘힘들어도 해보자’며 투자를 밀어붙인 영화였다.
 곳간이 넉넉지 않은 와우픽쳐스는 ‘실패에서 성공을 찾자. 독한 예방접종한 셈 치자’며 서로를 독려했지만 이상용 이사는 자괴감에 사표를 쓰게 된다. 회사를 힘들게 한 만큼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한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조직이 더 경각심을 갖고 단단해질 것이란 기대도 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자신이 반대하던 몇몇 프로젝트가 추진됐고, 신뢰했던 김주성 대표와 균열을 겪었다는 뒷말도 나왔다.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기 일주일 전 그를 청담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백수가 됐지만 좋은 점도 있더라”며 “당분간 시나리오 실컷 읽고 몸이나 만들겠다”며 활짝 웃어보였던 그는 뭐가 그리 급했는지 잠에서 깨지 않고 영원히 눈을 감았다.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나봐. 보따리 장사지만 대학 강의도 두 과목이나 들어왔다”며 좋아하던 모습도 눈에 선하다.
 그는 그날도 스트라이프 셔츠에 단정한 바지를 입고 있었다. 헤어지기 전 농반 진반으로 “어디서 사람 뽑으면 알지? 나 놀고 있다고 좀 알려. 아직 아이들이 어리다”며 너스레를 떨던 모습 역시 당분간 잊히지 않을 것 같다. 3일 밤 빈소를 지키던 두 초등학생 아들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너희 아빠 정말 멋진 분이셨어.” 영정 사진 속 그가 흐뭇하게 보고 있었다./bskim0129@gmail.com
'해운대'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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