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트' 이범수, 데뷔 25년차 배우의 어깨는 늘 무겁다[인터뷰]
OSEN 김보라 기자
발행 2015.09.11 18: 45

배우 이범수는 천의 얼굴을 가진 남자다. 느와르, 액션, 멜로, 코믹 등 어느 한 가지 장르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전 장르를 완벽하게 소화해낸다. 지난 1990년 영화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로 데뷔한 그는 어느덧 데뷔 25년차 베테랑 배우가 됐다. 이제는 눈을 감아도 보일 만큼 연기가 쉽지 않을까. 하지만 그는 “그럼에도 언제나 어깨가 무겁다”고 말한다.
이범수는 현재 방송중인 JTBC 금토드라마 ‘라스트’(극본 한지훈, 연출 조남국)에서 노숙자들을 거느리고 100억대의 지하경제 시스템을 만들어낸 악역 곽흥삼을 연기하고 있다. 처절한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싸우고, 짓밟으며 올라 선 서울역 지하경제 최고 인물. 한 치의 흔들림 없이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는 그의 악역에 시청자들의 호평이 쏟아지고 있다.
강형규 작가의 동명의 웹툰 ‘라스트’는 웰메이드 웹툰이란 찬사를 받으며 조회수 6000여 만 건을 기록했다. 뚜렷한 색깔을 지닌 캐릭터들과 촘촘하게 짜인 탄탄한 스토리로 독자들을 열광케 했기에 웹툰 속 모습이 드라마에서 어떻게 나열될지 관심이 모아졌다.

이범수는 11일 오후 한 카페에서 진행된 OSEN과의 인터뷰에서 “저는 일부러 웹툰을 보지 않았다. 봐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며 “작가의 손을 떠나 대본이 배우에게 오는 순간, 온갖 상상력을 통해서 재창조하는 것이 우리의 몫이기 때문이다. 다른 드라마나 영화처럼 원작이 있는 게 아니라고 여기고 제 나름대로 순수하게 해석을 해서 다가갔다”고 말했다.
▲‘악역 끝판왕’이라는 호평이 이어지고 있다.
“아무래도 캐릭터가 에너지를 필요로 해서 그런 것 같다. 저도 그렇게(뿜어내는) 연기를 해야지 연기를 한 것 같다. 곽흥삼 캐릭터야말로 시원하게, 마음껏 표출해볼 수 있는 캐릭터였기 때문에 무척이나 고맙다.”
▲캐릭터를 위해 서울역에서 생활하는 분들의 삶을 관찰했나.
“이 역시 일부러 안했다. ‘외과의사 봉달희’를 할 때는 병원에 다니면서 수술 연습을 했었고, ‘오! 브라더스’의 오봉구 캐릭터를 위해 초등학교 수업도 한 달 가까이 참관했었다. 등하교하는 아이들을 관찰하기도 했다. ‘닥터진’ 이하응 역을 맡았을 때는 리얼리티를 훼손하면 안 되기 때문에 역사책을 다섯 권을 읽으면서 연구했다. 하지만 ‘라스트’ 곽흥삼은 굳이 원작을 봐야겠다는 생각을 안 했다. 그가 노숙자가 아니라 조직의 넘버원이니까 하지 않은 것이다. 만약에 노숙자라면 지하철역에서 지냈을 것 같다.”
▲영화 ‘신의 한 수’에서도 그랬고 이번에도 캐릭터가 너무 무섭다.
“하지만 똑같지 않다. 잘 보면 캐릭터마다 다르다. 차별성을 둬야하는 만큼 골의 문은 좁아진다고 볼 수 있다. 문이 좁아지니까 더 도전해보고 싶었다. 사람마다 살아온 역사가 다르듯 캐릭터의 기준점이 선명했기 때문에 해볼만하다고 생각했다. ‘신의 한수’의 살수는 내성적이고 차분했고, 혼자 일을 처리하는 남자다. 뱀처럼 맹렬하면서 은밀하다. 당시 전작 ‘짝패’의 장필호와 구별점을 두고 연기했었다. ‘라스트’의 곽흥삼은 대본에 근거를 두고 마음 놓고 상상력을 펼쳤다. 고아로 서울역에 떨어져 어렵게 살지 않았나. 밑바닥부터 올라왔다고 설정했다. 살아남기 위해 별 짓을 다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시청자들이 보기에도 납득이 가게 만들고 싶었다. 살수가 10승 무패라면, 곽흥삼은 100전 23패다. 반칙도 있고, 기권도 있는 사람으로 그리고 싶었다.”
▲그런 면에서 곽흥삼이 살수보다 젠틀하다는 이야기인가.
“흥삼이가 젠틀한 면모를 지향하지만 그렇지 못한 인물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 이범수 표 ‘훈남’을 보고 싶어 한다.
“저도 맡고 싶다.(웃음) 하지만 훈남 이전에 배우는 어떤 캐릭터든 연기할 수 있어야한다고 본다. 저는 어떤 캐릭터든 매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누구는 없고 누구는 매력이 많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쁜 놈이든, 착한 놈이든, 루저(looser)든, 마초이든 작품 속 모든 인물은 매력이 있다.”
▲본인이 강조하는 그 매력이 무엇인가.
“모든 사람들에게 매력이 있다. 한눈에 보자마자 눈에 띄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오랜 시간 같이 지낼수록 빛을 발하는 친구들이 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단번에 보자마자 비주얼적으로 매력이 있는 사람을 원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해도 누구에게나 매력은 있다.”
▲필모그래피를 보면 그동안 외로운 캐릭터를 많이 했다.
“그럴수 있다. 하지만 제가 외로운 캐릭터에 끌린다기보다 단편적인 인물이길 원치 않는다. 사람들이 사는 게 다 그렇지 않나. 화려한 모습 뒤에 어두운 면이 공존한다고 생각한다. 제가 그런 인물을 표현하는 배우로서 또 다른 모습을 표현하려고 노력한다. 장치가 많으면 많이 표현하고, 없으면 없는 대로 그린다.”
▲작품 선택 기준은.
“복합적이다. 극 전체의 구성도 봐야하지만 제가 맡을 역할에 매력 포인트가 있어야 한다.”
▲출연할 영화 ‘인천상륙작전’은 어떤 이유에서 선택했나.
“일단 기획이 멋있었다. 우리가 6·25에 대해 알고 그 가운데 인천상륙작전을 알지만 과연 그 작전이 어땠고 정확한 내용은 모르지 않나. 개인적으로 궁금한 부분이 있었다. 저도 전쟁영화는 처음 해본다. 10월부터 촬영에 들어간다.”
▲일각에서는 지상파가 아닌 종편 출연을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고 싶었다.(웃음) 사람들이 ‘지상파를 하다가 비지상파에 왜?’라고 1초 이상 생각할 수도 있지 않나. 저는 그런 부분이 중요한 게 아니다. 작품이 좋고 매력적이면 어느 방송사든 갈 수 있는 것이다. ‘라스트’의 제작진은 정말 훌륭하신 분들이었다. 종편이 선구자적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데 제가 거절할 이유가 없지 않나. 그런 면에서 무척 행복한 작업이었다.”
▲대본에 충실한 스타일인가, 아니면 현장에서 받은 느낌에 충실한 스타일인가.
“대본에 충실해야만 한다. 그렇지만 현장에 가서 일단 빨리 적응을 해야 하는 것이 먼저이고, 적응을 마친 상태에서는 연기를 펼치는 데 집중해야 한다. 애드리브를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그 인물이 돼서 ‘과연 그 사람다운가?’를 고민한다. 연기를 하다 갑자기 대사가 떠오르면 감독님에게 ‘이런 대사는 어떤가요?’라고 제안을 한다. 인물이 더 살아 보이면 그제야 반영이 되는 것이다. 그게 애드리브다. 코믹장르에서 말장난을 하고, 깐죽거리는 게 애드리브가 아니다.”
▲근래 들어 선 굵은 남자 역할을 자주 봤다. 코믹 연기가 그립다.
“요즘 악역이 많이 들어온다.(웃음) 우선적으로는 연기를 펼칠 수 있는 공간이 많은 역할을 선호한다. 공간이 많다는 게 매력이 있어야한다는 말이다. 멜로나 코믹을 보고 싶어 하는 분들이 많이 있으시더라. 저도 맡을 의사는 언제나 있다. 단 매력이 있어야한다.”
▲데뷔한 지 벌써 25년이다. 이쯤 되면 연기가 쉬울 법도 한데.
“아니다. 저는 어깨가 더 무겁다. 신인시절에는 잘 해야 하니까 신경이 쓰였고, 프로가 되니 더 잘 해야 하기 때문에 신경이 쓰인다. 저는 요즘 들어 연기에 대해 알 것 같다. 제가 이제야 이런 말을 할 줄 몰랐다.(웃음) 작년부터 이런 생각을 하게 됐는데, 그 이유를 축구에 비유하면 지금껏 이기기 위해서 공을 잡아왔다. 이기기 위해서 골문에 전진패스를 하듯 연기를 했다. 하지만 요즘 공을 잡아서 뒤로 뺏는 여유가 생겼다. 시야가 넓어졌다고 할까?”
▲대형 소속사에서 나온 이유는 무엇인가.
“이런 저런 이유로 나오자는 판단을 내렸다. 사람들에게 배우가 되기 위해서 어떻게 준비해야 되냐는 질문을 받으면 막상 대답을 못하겠더라. 단순히 열심히 하라는 추상적인 대답을 끄집어냈었는데, 저도 도대체 무엇을 열심히 하라는 건지 막막했었다. 배우를 꿈꾼다는 게 운에 맡길 일은 아니다. 젊은 친구들의 시간이 너무 아깝지 않나. 학창시절, 제가 배우를 꿈꿀 때부터 가진 의문이었다. 무얼 준비해야 하는지 답을 주는 사람들이 없어서다. 세월이 흘러도 답을 내릴 수가 없었기에 내가 매니지먼트를 세우고 체계적으로 신인을 발굴, 교육하고 실전에 내보내 스타로 만들고 싶었다. 가수들은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추고 발전하는데 배우 기획사는 왜 그렇지 못한지 늘 답답했다. 저의 재능을 활용하고 싶었다.”
▲남을 가르치는 재능이 있나.
“저는 학창시절부터 연기에 대해 고민하고, 동기들과 연기에 관한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 후배들에게 연기를 알려주고 이끌어주는 재능도 있었다. 그런 재능을 활용하고 싶었다. 배우들의 등용문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조금 거창하지만, 마땅한 표현이 없다.(웃음) 부족하지만 현장에서 꼭 필요한 소양을 알려주고 싶다. 연극영화과에서 알려주면 좋은데, 막상 그렇지가 못하다. 대부분 이론적으로만 한다. (현재 저희 회사에)18명의 신인배우들이 있다. 일주일에 5일 이상 연기 수업을 한다. 앞으로는 공개 오디션을 통해 뽑을 계획이다.”
▲예능 출연은 일부러 안하는 건가.
“생각이 없는 건 아닌데 스케줄이 맞지 않았다.”
▲아내 이윤진 씨가 인스타그램에 아이들 사진을 자주 올리더라. 조심스럽게 육아 예능 출연을 추천해본다.
“사실 제안이 많이 들어왔다. 하지만 아이들을 위해서 찬성을 안했다. 왜냐하면 방송에 나가기 시작하면 여기저기서 섭외요청이 들어올 텐데 그러면 일상생활이 힘들다. 아이들이 그냥 평범하게 성장했으면 좋겠다. 물론 꿈이 배우이고 재능이 있다면 TV출연을 찬성하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평범하고 자유롭게 살았으면 좋겠다.”
▲촬영이 없는 기간에는 주로 뭐하고 보내나.
“아무래도 바쁠수록 시간이 없지만 그럴수록 잠을 줄이고 가족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애쓴다. 이 시대의 아빠들은 다 열심히 살아야 한다.(웃음)”
▲벌써 데뷔 25년차다. 앞으로 어떤 배우로 기억되고 싶나.
“배우 인생을 돌이켜보면서 매 순간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왔던 것 같다. 내일 당장 생을 마감한다고 하더라도,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최선을 다했다. 배우라는 게 누군가에게 간택이 돼야 하는 직업이다. 한마디로 승부사다. 기지를 발휘해서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가 달렸다. 한 두 작품 흥행을 못하고 대중의 반응이 시원찮으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저는 항상 현실을 직시하고 있다. 사라지기 전까지 여한 없이 소신껏 진실 된 배우로서 살아가고 싶다.”/ purplish@osen.co.kr
손용호 기자 youngrae@osen.co.kr

Copyright ⓒ OSEN.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