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김범석의 사이드미러] 치약 선물 세트를 고르자니 너무 성의 없어 보이고 그렇다고 송이버섯을 짚자니 지갑이 운다. 이런 심리를 간파해 언제나 진열대 정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게 바로 실속형 상품이다. 보내고 받는 이 모두를 만족시키는 와인이나 제수용 과일 세트가 가장 많이 선택, 배송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서부전선’은 뛰어난 고품격 전쟁 영화도 아니고 저급한 싸구려 코미디로 무장한 그렇고 그런 영화는 더욱 아니다. 명절용 12세 관람가에 맞게끔 알맞은 농도와 빈도를 갖춘 웃음이 여럿 장전돼 있고 후반부엔 제법 가슴을 적시는 뭉클함까지 담아낸 전쟁 휴머니즘 영화다. 웃음과 눈물 코드의 배합 비율은 약 7대3 정도 되겠다.
관객을 마음껏 웃겼다가 울리는 탁월한 쥐락펴락과 노련미는 발견되지 않지만 가급적 MSG 대신 멸치 국물로 맛을 내려한 제작진의 선한 마음과 한결같음이 여기저기서 느껴진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시종일관 착해야 한다는 강박이나 콤플렉스에 갇혀 허우적대진 않는다. 또 가족 영화를 표방하다 보니 설경구의 슬랩스틱 코미디까지 등장하지만 그렇다고 말장난이나 몸으로만 승부를 보려하진 않는다.
‘해적’ 유해진의 ‘음파음파’에 버금갈 만큼 두 주인공이 벌떼 공격을 받은 뒤 된장, 고추장을 환부에 덕지덕지 바를 땐 큰 웃음 파도가 한바탕 극장을 뒤집어 놓는다. 뱀술을 마신 뒤 처음으로 속내를 털어놓는 둘의 모습도 짠하면서 흥겨웠고, 마치 ‘벤허’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소달구지 추격신도 화끈한 웃음 포인트였다.
대열에서 이탈한 두 남북 병사가 서로 총구를 겨누다가 동병상련의 감정을 공유하고 급기야 연민으로 발전하게 된다는 점에서 ‘웰컴 투 동막골’이 겹쳐지지만 얼개와 일부 스토리 라인만 흡사할 뿐이다. 오히려 ‘서부전선’은 각각 탱크와 비밀문서를 지켜야 하는 두 어리바리 남북 군인의 딜레마에 보다 더 집중하고 바로 이 지점이 각종 해프닝과 사건 사고가 전개되는 꼭짓점 구실을 한다.
남복(설경구)과 영광(여진구)은 태생과 착용한 군복이 다를 뿐 공통점이 많다. 고향에 두고 온 가족과 연인을 위해 반드시 살아 돌아가야 한다는 점, 또 전쟁 영웅이 돼 팔자를 고쳐 보겠다는 가장과 남자로서의 욕망과 충돌이 대표적이다. 이런 요인들은 이념과 별개로 둘을 갈등, 적대시하게 하는 코믹 불쏘시개로 작용하는데 중반까지 영화를 끌고 가는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해낸다.
아쉬운 건 3분의 2까지 영화를 관통하는 게 코믹인데 점층적인 웃음으로 발전하지 못 하고 있다는 점이다. 적어도 코미디가 관객과의 기싸움에서 승기를 잡으려면 절묘한 타이밍과 이에 상응하는 리액션, 디테일 삼박자가 맞아떨어져야 할 텐데 ‘서부전선’은 세 개의 조화가 느슨해 보인다. 마치 ‘개그콘서트’ 속 화제의 코너가 계속 이어질 뿐 뒤로 갈수록 쌓이는 웃음이 정작 영화가 의도한 페이소스로 연결되지 못한다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서부전선’이 실속형 선물세트처럼 여겨지는 건 전적으로 설경구 여진구의 케미 덕분이다. 설경구는 연출자에 따라 연기의 온도가 달라지는 대표적인 배우 중 하나인데 이번엔 ‘나의 독재자’ 같은 열탕이나 ‘소원’ 류의 냉탕이 아닌 적당한 온탕 수준을 보여줬다. 신인 감독을 만나 서로 열의가 넘쳐 비등점을 넘으면 어쩌나 가슴 졸였지만 노련하게 감정을 잘 억누르며 오히려 많은 걸 보여줬다.
‘화이’에서 제대로 포텐이 터진 여진구도 왜 충무로가 그를 주목하는지 알게 해준다. 순수한 청년과 전쟁에 휘말려 자기도 모르게 서서히 괴물이 돼가는 모습, ‘개간나 국방부’라며 욕을 퍼붓지만 어느새 형이 돼버린 남복에 대한 애정과 쓸쓸함도 실감나게 그려냈다. 티어스틱이 아닌 진심을 담은 눈물 연기도 일품이었다. 아직 보여줄 게 무궁무진한 고3이라는 사실이 반가울 정도로 배역과 혼연일체가 된 연기였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추노’ ‘7급 공무원’ ‘해적’ 등을 쓴 스타 작가 천성일의 연출 데뷔작이다. 개봉 일주일 만에 200만 명을 동원한 ‘사도’를 포함해 ‘메이즈 러너2’ ‘탐정’ ‘에베레스트’와 5파전을 벌인다. 예매율은 '사도'에 이어 2위이고 24일 개봉한다./bskim0129@gmail.com
'서부전선' 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