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 비극 ‘사도’, 현실 정치를 떠올리게 하는 문제적 장면 셋
OSEN 손남원 기자
발행 2015.09.23 06: 58

[OSEN=김범석의 사이드미러] 영화 ‘사도’가 개봉 일주일 만에 200만 명의 관객을 모으며 흥행 레이스를 펼치고 있다. 2주차 주말을 앞두고 톨게이트를 지나 본격적으로 고속도로에 들어선 모양새다. 기대치를 반영하는 예매율 역시 커밍순 신작 ‘서부전선’ ‘탐정’ ‘에베레스트’를 멀찍이 따돌리며 1위를 지키고 있어 이변이 없는 한 올 추석 극장가를 리드할 것으로 보인다.
 ‘사도’가 이렇게 뜨거운 열기를 내뿜는 이유에 대해 다양한 해석과 의견이 나온다. 귀가 닳도록 알고 있던 사도세자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화면에 구현해 신선하게 전달했다는 평가와 더불어 국내 최고 개런티를 받는 송강호와 ‘베테랑’으로 재조명된 유아인의 팽팽한 긴장과 이완이 대중을 사로잡는데 한몫 했다는 목소리다.
 조철현 작가 겸 감독이 한중록에 근거해 각본을 쓴 ‘사도’는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지 않는 범위에서 각색 작업이 이뤄졌다고 한다. 아버지 영조의 기대를 밑돌아 미움을 받게 된 사도가 직계 존속 살해기도 혐의로 뒤주에 갇히고 7일째 되던 날 무릎조차 못 편 채 죽음을 맞아야 했던 과정은 거의 팩트에 가깝다.

 흥미로운 건 이준익 감독이 이 궁궐 비극을 다루는 과정에서 선택과 집중을 통해 절묘하게 현실 정치를 오버 랩 하려한 것 아니냐는 관전평이 나오는 대목이다. 감독의 의도가 노골적이지 않아 쉽게 눈치 채지 못한 이들도 있지만, 영화를 재 관람한 일부 관객들은 “영화가 군데군데 현실 정치를 은유, 조롱하고 있어 흥미롭다”고 말한다.
 먼저 영조가 대리청정을 맡겼다가 실망한 사도에게 싸늘한 표정으로 “왕은 결정하는 자리가 아니다”라고 일침을 놓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자신이 30년 넘게 일궈놓은 정치판을 개혁이라는 명분하에 하루아침에 뜯어고치려는 사도를 괘씸하게 여긴 영조가 “왕은 신하의 결정을 윤허하고 책임을 묻는 자리”라며 따끔하게 훈계한다. 차기 대권을 노리는 잠룡들과 청와대의 보이지 않는 헤게모니 싸움을 연상시키는 대목으로 해석됐다는 이들이 적잖았다.
 특히 국방과 조세와 관련해 지지 기반 신하들에게 약점을 잡힌 영조는 아들이 이 부분을 건드리려 할 때마다 표정이 일그러진다. 국방 담당 신하들의 기득권과 이권을 적당히 눈감아 주고 그 대가로 충성을 보장받은 왕의 커넥션을 사도가 흔들려하자 이해관계에 얽힌 이들이 대놓고 발톱과 송곳니를 드러낸 것이다. 왕과 킹메이커들의 유착과 어쩔 수 없는 긴장 관계도 엿보였다.
수어청과 호조가 은과 쌀로 다투는 장면에선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풍자가 빛을 발했다. 서로 꿔간 물자를 내놓으라고 언쟁을 벌이고 사도에게 ‘어찌 하오리까’ 묻지만 이미 왕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 사도는 우물쭈물하며 아무런 답변을 내놓지 못 한다.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영조는 “서로 원하는 걸 맞바꾸면 되지 않느냐”며 원론적인 답을 마치 명쾌한 솔루션인 것처럼 말한다. 당정청이 서로 짜고 치는 요즘 정치의 한심한 모습이 슬쩍 겹쳐지는 장면이었다.
거사를 앞두고 선친 숙종의 묘를 찾아 깍듯하게 예를 지키는 영조의 모습은 형(경종) 독살 의혹을 받는 불안함과 딜레마를 보여주는 동시에 정치적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이자 리추얼로 읽혔다. 요즘으로 치면 국립서울현충원이나 4.19 묘지 같은 장소다. 자신의 왕권과 권위에 도전하는 사도에게 애꿎은 날씨 탓을 하며 ‘넌 할아비를 볼 자격이 없다’며 돌아가라고 명하는 곳도 바로 숙종 참배를 위한 행차 길이었다.
왕가의 법도와 예법을 중시하고 대님 묶는 것 하나까지 주의를 기울여 신하들에게 책잡히지 않길 원했던 최고 통치자의 완벽주의와 외로움도 많은 걸 시사하게 했다. 대통령이 경제 활성화를 강조할 때 레드, 북의 군사적 위협에 대처할 때 카키색 의상을 자주 입는 것도 이와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영화를 보면서 가장 피부에 와 닿았던 현실 정치에 대한 은유는 ‘과연 짐에게 충신은 누구인가’를 묻는 영조와 사도의 쓸쓸함과 헛헛함이었다. 영조는 내심 장기 집권을 꿈꾸지만 신하들의 충성심을 시험하기 위해 왕권을 내려놓겠다는 정치적 쇼를 여러 번 감행한다. 아비에게 물벼락을 맞은 사도도 세숫대야로 자기 신하들의 머리를 내리치며 ‘네들은 뭐하고 있는 거냐’며 분풀이 한다. 들끓는 간신과 당파 싸움 속에 충신들은 마지막 수단인 상소를 올리며 자결하거나 외롭게 궁을 등지게 된다.
‘사도’에는 특이하게 명나라에서 사도에게 선물한 몽이라는 애완견이 등장한다. 뒤주에 갇힌 주인 곁을 서성이던 몽이는 안절부절 못한 채 컹컹 짖고 마침내 사도는 이렇게 읊조린다. ‘몽아, 너도 왕이 무섭더냐?’ 천민으로 추락한 사도를 모두 외면할 때 오직 개 한 마리만이 주인의 체취를 그리워한다. 혹시 개만도 못한 일부 약삭빠른 정치인들에 대한 감독의 디스라고 한다면 지나친 해석인 걸까./bskim0129@gmail.com
[사진] '사도' 포스터 

Copyright ⓒ OSEN.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