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권상우는 청춘의 아이콘이었다. 이소룡에 버금가는 탄탄한 몸매, 훤칠한 키, 해사한 미모의 그는 '화산고'(2001), '일단뛰어'(2002), '동갑내기 과외하기'(2003), '말죽거리 잔혹사'(2004) 등의 영화에서 고등학생 역을 맡으며 뭇 여성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배우로서 그의 매력은 무모하고 뜨거운 청춘의 순수성을 근사하게 그려내는 점에 있었다.
그런 권상우가 달라졌다. '추리닝'을 입고, 아내의 잔소리에 냄새나는 음식물 찌꺼기를 들고 달린다. 막내의 똥 기저귀를 갈아주다, 손에 묻은 오물로 장난을 친다. 넘치는 호기심 탓에 자신과 상관도 없는 사건들을 추리하겠다며 나서는 모습은 엉뚱하다. 비록 드라마 '야왕', '유혹' 등에서 기혼남의 역할을 하긴 했지만, 이처럼 생활에 찌든 '아저씨'의 모습은 관객들에게 다소 낯설다.
영화 '탐정: 더 비기닝'(김정훈 감독, 이하 '탐정')에서 권상우는 몸소 '개그'를 담당했다. 이 영화에서 그는 성동일과 투톱인데, 얼핏 코믹해 보이는 성동일이 웃음을 담당할 것이라 예상하기 쉽다. 하지만 실제 영화에서 두 사람의 분위기는 예상과 정반대다. 둘의 콤비 플레이가 웃음을 자아내지만, 가차없이 망가지는 쪽은 권상우다. 장기인 액션도 줄였다. 오로지, 추리와 '바보(같은 천재) 개그'에만 집중한 듯 하다.
왜 권상우는 망가졌을까? 그는 개봉을 앞두고 OSEN과의 인터뷰에서 "원래부터 망가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며 "배우로서 관객들이 권상우를 보고 상상하지 못했던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욕심도 많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사실 그가 이렇게 망가지는 역할을 택한 데는 욕심 이상의 것이 있었다. 배우로서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었다.
또 같은 인터뷰에서 그는 "영화배우로서 한국에서는 위기라고 생각한다. 제가 올해 한국나이로 40살이다.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의 남자 배우들은 누구나 슬럼프를 겪는 것 같다. 이런 고민을 하게 된지 꽤 됐다"며 "내가 정우성처럼 멋있는 역할만 할 수 있는 배우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와 비슷한 또래의 배우들이 어떻게 슬럼프를 극복했고 어떤 상황에서 어떤 영화를 선택했고 어떤 길을 걸어갔는지 연구하고 있다"며 고민을 드러냈다. 한마디로 배우로서 '진화'가 필요한 시기라 느낀 것.
실제 영화 속에서 권상우는 많은 것을 내려놓은 듯 보인다. '찌질한' 아빠를 '연기'하지 않고 그 자신으로 받아들인 듯 편안하게 보여준다. 비록 평범한 만화방 주인에 '추리덕후' 치고는 몸매가 뛰어나다는 점(?)이 살짝 어색하지만, 그 밖의 연기적인 부분에서는 보고있는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점이 없다. 폼나지 않아도 어색하지 않다는 것은 권상우에게는 또 다른 진화가 일어났다는 의미다. 청춘 스타의 '멋'은 없어도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진솔한 배우의 '멋'은 있다.
배우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결국엔 스타와 배우의 갈림길에서 고민하게 되는 경우들이 많다. 특히 젊은 시절 이미 큰 성공을 맛본 톱스타들은 적절한 진화를 통해 스타로서의 가치가 떨어지기 전, 배우로서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한 단계 도약이 필요하다. 물론 권상우는 여전히 한류의 중심에 있는 스타다. 그럼에도 빠를수록 좋은 게 준비다. 성실히 진화해 가는 권상우의 모습이 반가운 것은 이 때문이다. /eujenej@osen.co.kr
[사진] '탐정' 스틸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