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자체가 스포일러다. 사도세자는 결국 아버지인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는다. 정치적 이념과 당파싸움, 부자간의 갈등 등 다양한 문제들이 얽히며 긴장감 넘치는 스토리가 전개되지만 답은 이미 정해져있다. 아는 이야기를 또 한 번 듣는 것만큼 지루하고 진부한 일도 없을을 테다. ‘반전’을 기대할 수 없는, 모두가 결과를 알고 있는 이야기. 그 안에서 ‘재미’를 만들어 나가는 일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영화 ‘사도’는 철저한 고증을 통해 교과서 이상으로 역사를 정통하면서도 시선을 뗄 수 없는 몰입감으로 관객들의 흥미를 자극한다. 모두가 아는 이야기로 채운 125분의 묵직한 러닝타임은 좀처럼 지루할 틈이 없다.
비결은 시간의 병렬연결이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뒤 8일의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과거에 있었던 주요한 사건들이 플래시백으로 등장하는데,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연결들이 꽤나 흥미롭다.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결과’를 미리 보여주고 왜 이런 사단이 벌어졌는가를 귀납적으로 보여주는 연출이 이 영화가 주는 재미의 핵심 포인트다.
영화의 틀을 이루는 플래시백 기법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하는 장치도 효과를 톡톡히 해낸다.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기법으로 ‘디졸브’가 사용되는데, 인물의 클로즈업 샷이 현재의 모습과 과거로 부드럽게 이어지면서 촌스러울 수 있는 설명을 대신하며 사극이 세련되게 표현된다.
극의 중심에 서 있는 두 배우 송강호와 유아인의 명연기를 감상하는 것도 관전 포인트 중 하나. 이미 두 사람은 연기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감탄을 자아내며 보는 맛을 더하게 만드는 명배우임이 확실하다.
사도세자를 연기하는 유아인의 얼굴에는 영화 ‘베테랑’의 조태오가 묘하게 디졸브된다. 완전히 다른 스타일의 연기로 두 캐릭터의 각기 다른 매력을 표현해내지만, 뭔가 겹치는 부분이 있다. 사도세자가 권력가의 아들이고, 조태오가 재력가의 아들이라는 것, 정신적인 부분에 문제가 있다는 공통점 정도의 미시적인 차원이 아니다.
이는 자신이 맡은 캐릭터를 ‘유아인 화’시키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절로 풍겨져 나오는 반항기와 한 번 결심하면 놓치지 않을 것 같은 독기와 ‘깡다구’. 이 같은 요소들이 만들어내는 불안한 분위기와 어딘가 외로워 보이는 특유의 감성은 ‘유아인’이라는 배우가 가진 독보적인 색깔이다. 그가 내는 이 같은 색깔이 영화 속 캐릭터와 만나 어우러지면서 빛을 내고 있는 모양새다.
영조 역을 맡은 송강호의 연기는 말이 필요 없다. 연출을 맡은 이준익 감독은 앞서 OSEN과의 인터뷰에서 “송강호는 연기의 신”이라고 엄지를 치켜세우며 “만족의 수준을 넘었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하다”고 밝힌 바.
특히 마지막에 등장하는 ‘뒤주와의 대화’ 신에서는 엄청난 몰입감을 만들어내며 극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한다. 아들이 갇힌 뒤주를 바라보며 사도와 대화를 나눈다. 왕이 아닌 아버지로서의 진심을 털어놓는 롱테이크 신은 오직 송강호만이 연기할 수 있는 것이었다. 무려 9분이다. 이 긴 시간을 컷 없이 한 번에 끌고 갈 수 있는 힘이 대단하다.
이 밖에도 고증을 통한 심도 있는 연출들이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며 보는 즐거움을 더한다. 과거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궁궐의 웅장함이나 의상의 살아있는 디테일. 비장미 넘치는 배경음악과 빈틈없는 조연들의 연기, 소지섭의 카메오 출연까지. 이미 결말을 알고 있음에도 ‘사도’를 볼 이유는 충분하다./ joonamana@osen.co.kr
영화 '사도' 스틸컷.